나는 달. 당신은 지구.

by 정자까야

여름은 퇴근 후 다희를 만나러 갔다. 해 넘기기 전 만나자며 정한 날이다. 삼총사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만남은 '언제 한 번 보자'이고 그게 언제가 될진 기약이 없는 것이 보통이다. 다희에겐 그런 세상이 없다. 안만나면 모를까 만나자면 날을 정확히 잡는다. 불가피하게 연기할 일이 생기면 바로 다시 날을 정한다. 삼총사 중 아토스 정도만 이 정도 타이트함을 견딘다. 여름은 허허실실 비교적 다희와 잘 지내는 편이다. 지킬 건 확실히 지키고 못지키는 일이 생기면 돌려 말하지 않고 사과했다. 다희도 여름의 그런 면이 좋아 길게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십수년을 함께 했다.


김여름씨. 애써 크리스마스 피해서 약속 잡아 드렸것만..그런데 어제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군요.

어제 뭐했냐고 물어 혼자 있었다는 여름의 말에 다희는 기가 차다는 듯이 물었다.


그런거지. 세상 일이 어찌 뜻대로 돌아가겠소. 현자는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하는 법.


에이구. 보기 딱해서 그럽니다. 아 그 정도면 인물도 어디 안빠질 것 같은데 왜 그리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시는지..


과찬이시오. 그리 말해주니 기분은 좋소만 명백한 과찬이오. 다른 얘기 말고 술이나 마십시다.


여름과 다희는 벌써 소주를 2병째 땄다.


오빠. 그 언니는 그렇다치고 사랑의 경쟁자들은 어떤 사람들이야?


응? 아..그 사람들..글쎄. 겨울씨 표현에 따르면 아주 괜찮은 사람들. 드라마에서 내가 주인공이면 그 연적들은 나쁜 인간들로 묘사되겠지만..현실은 안타깝게도 셋다 괜찮은 인간들.


하긴. 드라마는 그래야 뜨니까. 선악이 분명해야 시청자들이 누굴 응원할지 확실해지겠지. 남주보다 연적이 더 괜찮다? 와..이건 드라마가 산으로 가는거다. 그치?


그러게..지금 내 드라마는 산으로 가고 있는 것 같네..여름은 웃었다.


조금 더 얘기해봐. 듣기 싫은 얘기라 겨울씨가 얘기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거야?


그럴리가..여름은 나지막히 말했다.


어떤 얘기보다 귀 기울였던 얘기다. 왜 겨울씨가 가을이란 사람을 놓지 못하는지. 봄이란 남자는 겨울을 어떻게 웃게 하는지..그런 것들이 신경쓰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가을이란 사람은..글쎄..그간 들었던 조각조각을 얼추 짜맞춰보면..정의로운 변호사? 뭐..그렇다고 영화에 나오는것마냥 정의 빼면 시체..이런 수준은 아니고..남들보다 조금 더 그런 문제에 예민한..


그걸 정의롭다 할 수 있는 건가? 다희는 술을 넘기며 혼잣말로 얘기했다.


하긴..그 얘길 듣고 있자니 그렇기도 하다. 하지만 가을이란 사람이 자신을 그리 PR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냥 우리끼리의 얘기일 뿐. 여름도 다희를 이어 술 한 잔을 넘긴다.


봄이란 사람은요? 그 분 대학 후배라던..


아..김 봄. 얄미울 정도지. 겨울씨에게 잘 하는 게. 오래전부터 좋아해놓곤 한마디도 못했던 의외의 순정파. 잘생기고 집안 좋고 본인도 똑똑해서..결혼정보회사 어디를 가도 VIP대접 받을 인물. 가끔 네가지 없이 행동하긴 하는데.. 그리 자란 것치곤 그래도 완전히 망가지진 않았다는 느낌이랄까. 의외로 괜찮은 인간일수도 있고.


아까 오빠가 해 준 얘기부터 좀전에 내린 총평을 종합해보면 왠지 그 봄이란 사람 성격이 나랑 맞을 것 같기도 해. 다희의 말에


여름은 고개를 돌려 씩 웃고는


나도 얼핏 그 생각 들더라. 그 쪽도 직진. 너도 직진이니까.


게다가 잘생기기까지 했다며..나 같은 미모에 그 정도 인물은 돼야지 암..다희는 팔짱을 끼곤 웃으며 말했다.


여름은 다희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농담처럼 말하지만 확실히 다희는..어느 편이냐고 묻는다면..예쁜 것이 분명했다. 아라미스와 브루토스도 다희에게 고백했다 딱지를 맞았다. 녀석들은 그에 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다희가 여름에게 알려줘 알고도 모르는 체 할 뿐.


그러니까 내가 정리를 해보면..아 그 전에 소주 한 병 더 가능해?


아니..가능하지 않아..그만 마시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로 가 소주 한 병을 들고 왔다.


이럴거면 묻질 말던가..여름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와 동시에,.이 녀석의 매력에 나는 왜 넘어가질 않았을까..그런 의문도 일었다.


내가 정리해보면.. 가을이란 사람은 정의로운..잘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쳐. 뭐라 규정할 게 필요하니..그렇게 정의하자고. 정변..정의로운 변호사라고. 다희는 깔깔 소리내 웃었다.


내 참..자기가 말하고 자기가 웃네..여름은 다희의 웃음에 따라 웃으며 말했다.


김 봄은..그러고보니 나보다도 어리겠네..그래 봄이는 차도남..딱이네. 시선이 한 여자에게만 고정된 차도남.


그래..차갑긴 하지..확실히. 여름은 김봄과의 다소 불쾌했던 만남을 떠올렸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 그대 여름은..


기왕이면 멋있는 걸로 부탁해. 여름은 두 손을 모으며 기도하는 듯 장난을 쳤다.


대나무..


대나무?


그래. 대나무..폐허에서 솟아나는..다희는 폐허라는 말을 유난히 강조하며 말했다.


폐허라..그건..


그래 오빠가 젤 좋아하는 단어지. 기억나? 내 친구 선영이랑 펜팔했던 거? 2학년 3반 폐허입니다..

다희는 테이블에 엎드려 흐느끼듯 웃었다. 여름은 그런 다희의 정수리를 보며 어이가 없는 듯 실소했다.


다희는 애써 웃음을 참고는


사람들은 오빠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모르지. 하긴 본인도 모르는데 다른 사람들이 어찌 알겠어. 항상 김여름을 대나무라고 생각했어.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면 그건 대나무처럼 수년을 뿌리내리는 중이기 때문이라고. 일단 대지를 뚫고 나오면 하루에 1미터 이상도 커버리는 대나무처럼..오빠의 포텐도 멋지게 터질거야. 한가지 더. 일단 그렇게 자리를 잡은 대나무는 바람에 따라 휠지언정 부러지진 않아.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할거야. 그게 김여름의 큰 장점이고.


여름은 술이 확 깨는 듯했다. 아프지 않게 비꼬는 것이 여름이 알던 다희였지만 지금의 평가는 애정이 묻어난 응원이기에.


오빠. 김여름씨. 나도 나이가 들었나 가끔 화가 나더라. 내가 오빠 후배지만 그래봐야 한 살 차이 아냐. 사회에서 만났으면 서로 존대하는 사이라고. 십수년 선후배 사이로 있으니 마냥 편한 모양인데 사람 관계 그거 그냥 우연일 뿐이야..선배랑 그 겨울씨라는 분이 나처럼 오래된 인연이었다면..김여름이 지금같은 사모곡 쓰고 있었을까.


다희의 말이 딱히 틀린 것도 아니었다. 여름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요는 나도 좀 존중해주십사..그런 얘기야. 김여름이란 사람의 가치를 나만큼 잘 아는 사람 있을까? 아니..아무도 없어. 그런데도 우리가 이어지지 않았던거? 글쎄..그것도 운명의 장난이지. 둘 다 매력적인 사람들이라 옆구리가 시릴 틈이 없었던거..랄까.


다희는 취한건지 취한 척 하는건지 테이블에 연설하듯 손을 올려놓고는


나한테 여러사람 동시에 만난다고 뭐라 할 필요 없어. 따지고 보면 그 겨울이란 분도 똑같잖아. 본인이 태양이야? 왜 주변에 행성이 세 개나 도는건데..그리고 사실은 선배도 그렇잖아. 나 내쫓지 않는거 보면..선배의 인력은 드러내놓지 않을 뿐이지..끌어당기고 있거든..분명히.


여름은 뭐라 말해야할지 몰라 술잔과 다희의 얼굴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선배. 그 분 어머니..정변호사는 맞서다 부러질 거야. 본인 자존감을 훼손하는 걸 참을 수가 없거든. 상대가 비록 사랑하는 사람의 부모라 해도. 차도남 개는 자존심이고 뭐고 내팽개칠거야.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전에는. 하지만 그 후에는? 아마 셋 중에 가장 변질이 심할걸..어머니는 후회할 지도 모르지만..글쎄..자존심 문제라 그렇지 않은 척 연기할지도..그리고..우리 김여름씨는 유연하게 대처할거야. 어머니에 맞서야 할 때와 맞춰야할 때를 구분해서..이상적인 사윗감이지. 하지만 그런 것은 일단 겨울이란 사람과 결혼한 후의 문제고..어머니는 아마 선배를 후보 중 가장 먼저 내치겠지..


취기 때문인지 다희의 분석은 꽤나 설득력 있게 들렸다.


난 결국 그 애정 싸움의 키는 겨울이라는 사람이 쥐고 있다고 봐. 어머니 보다는. 어머니는 선배를 내치겠지만 그 사람이 선배를 포기하지 않으면 선배도 대나무처럼 잘 처신해 나가겠지.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하지만 만약 가을이나 봄을 선택한다면..그건 그 여자가 선배의 진정한 가치를 결국 몰라본거겠지. 아직 흙 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는데..드러난게 없어 선배가 대나무인걸 몰라본 거야. 그 땐..그 기회가 정말 온다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거야.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나도 베팅을 할지도 모르겠네..그 땐 선배도 분명하게 해줬음 좋겠어. 달을 놔 주든가. 아예 지구로 당기든가..


다희야..


여름은 말을 더듬었다. 목이 말라 물을 찾았지만 보이는 건 소주뿐이다. 술을 털어넣는다. 속이 더 타들어간다.


내가 지구는 아니지만..그래 내가 그리 아름다운 지구일 리가 없지만..아니 그래도 네가 달이라면..네가..날 지구라고 하면..그래 그럼 지구가 맞겠지..고마워. 그렇게 말해줘서..


여름은 동해 바다를 떠올렸다. 조수 간만의 차는 태양이 아닌 달의 인력으로 일어난다. 달은 태양에 비할 수 없이 작지만 지구와 워낙 가깝게 붙어있다. 크기가 아닌 거리가 지구의 바다에 파도를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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