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도 진심입니다.

by 정자까야

선배. 올해 봉사활동 갈건가요? 두어 달 전쯤 봄이가 겨울에게 물은 적이 있다.


겨울과 봄이 속해있던 대학 동아리는 매년 한차례 봉사활동을 했다. 일종의 지역 사회공헌 같은 전통이었다. 어린이집이나 독거노인 등을 대상으로 공연도 하고 장갑 등을 떠서 드리곤 했다. 겨울은 불가피한 일이 아니면 거의 매해 참석해서 동아리 지인들과 안부도 나누고 이웃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힘닿는데까지 일했다. 봄이도 겨울만큼이나 자주 왔고 부잣집 도련님 이미지와는 달리 요령피지 않고 땀을 흘렸다.


미희도 이 멤버 중 하나다. 원래 연극에는 관심이 없다가 졸업할 때를 몇 달 앞두고 단역이라도 하고 싶다며 가입했다. 취업 준비에 바빠 졸업생들은 극 참여률이 낮았는데 미희는 늦게 시작해서인지 졸업 시즌에 가장 열심이었다. 졸업 이후 봉사 활동도 비교적 꾸준했다.


어. 가야지. 12월 말이라고 했지?


마지막 주 주말이요.


맞아. 그랬던 것 같아. 일정 없이 비워둿었어. 봄이 너도 와?


네. 바늘 가는 데 실 안가나요?


(웃음) 넌 그런 얘기를 웃지도 않고 하니. 어쨌든 고맙다. 또 팔 걷어부치고 일해봐야지.


그제서야 웃는 김봄. 마음에 있는 얘기를 그냥 한 건데 하고 나면 주위가 싸해지는 때가 있어요. 가끔 양념을 쳐야 하는데 그런 걸 잘 못해요.


뭐..그게 네 매력이기도 하니까. 네 말대로 그게 진심으로 느껴져서 감동일 때도 있고.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해요. 선배한테 인정받는 거만큼 들뜨는 일이 없어요.


김봄은 그리 말하고 동아리실을 나갔다. 그게 가을의 끝무렵..만추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때 동아리 멤버들이 모처럼 대학 동아리실에 모였었다. 연습하던 무대가 보였다. 수많은 밤을 대사를 외우고 상대와 눈빛을 교환하며 보냈던 곳. 하지만 그 때 겨울의 마음에 떠오른 이미지는 대학 시절의 공연이 아니었다. 벚꽃 내리던 공원에서 행인을 아랑곳 않고 펼쳤던 여름과의 단막극이 겨울의 눈앞에 펼쳐졌다. 대사 한 줄뿐인 단역이었지만 겨울은 얼마나 극에 몰입했던가. 겨울은 나지막히 읊조렸다. 오케이 잭..


뭐라고? 방금 뭐라고 한거야?

미희가 물었다. 너무 상념에 잠겨 미희가 다가오고 있는 지도 몰랐던 겨울. 상기된 얼굴로 얼버무렸다. 아니..옛날 생각나서..우리 연극했던 거..


그래. 넌 그럴만해. 다 쏟았잖아. 아쉬워. 나도..더 일찍 했음 좋았을텐데..


그리곤 겨울과 미희는 캠퍼스 변한 거 봤느냐며 아직도 소녀인 양 깔깔대고 웃었다.


어느새 들어온 김 봄이 멀찍이 두 사람을 쳐다보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다시 두 사람을 보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다가와


선배님들. 저도 선배님들 먼 발치에서 보는 거 좋아하지만 시간이 없어서 더는 못기다리겠어요. 여기 봉사 당일 스케줄 있어요. 겨울 선배는 요양원에 가서 두어시간 할머니들 식사 도와드리고 말벗하고 오심 돼요. 미희 선배는 근처 어린이집 가서 애들이랑 놀아주고 오시구요. 식사도 먹여줘야 하는 장애 친구도 있을거에요. 끝나고 다 같이 만나 커피 한 잔 할거구요.


아..겨울이랑 같이 가고 싶은데..근데 봄이 넌 어디로 가?


저는 겨울 선배랑 같은 조더라구요.


미희는 조편성이 맘에 안들었는지 따지듯이 물었다. 이거 누가 짠거야?


몰라요 저도. 아마 현 동아리 회장이 짜지 않았을까요.


미희는 동아리 회장이 누구냐며 동아리실을 빠져나갔다.


겨울과 눈이 마주친 봄은 어깨를 으쓱 들어올렸다.


나도 미희랑 같이 있음 했는데..인원 적절히 나누긴 해야겠지만..재학생 회장은 졸업생 명단 짤 때 누군가에게 안물어보나? 졸업생 성향이나 선호도도 반영했음 좋았을텐데..


그냥 짜진 않았겠죠. 종합해서 하지 않았을까요..


.

.

.

.


그런 대화들이 오갔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두어달이 흘러 당일이 됐다. 미희의 볼멘 소리에도 조 편성은 바뀌지 않았다. 다만 다음에 또 조를 나눠야 하는 경우가 생기면 반드시 겨울과 한 조로 편성하겠다는 다짐을 받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겨울이 속한 조의 대여섯명은 지하철역에 모여 함께 이동했다. 겨울과 봄은 나름 고참급이라 후배들이 다가오기 어려웠는지 이동하는 동안에는 주로 겨울은 봄과 대화를 나눴다. 다짜고짜 찾아와 어머니 일로 겨울을 상심시킨 이후 봄은 조금은 더 진지해지고 신중해졌다. 겨울에게도 그런 게 느껴졌다. 자신의 방식대로 자란 사람이었다. 인생의 좌절이랄 것도 별로 없었다. 자신있게 밀고가서 안된 일이 없다보니 역설적이게도 긍정적이 되고 다시 도전적이 되고 그게 또 성공을 불렀다. 하지만 사람 일은 꼭 그 방식이 통하진 않는다는 걸 깨달은 양..진지하게 노력하는 천재같다고나 할까. 지하철 손잡이를 잡고 있는 봄이의 옆모습은 분명 성숙한 느낌이 있었다. 자신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모습이 고맙고..남자로서의 듬직함도 묻어나 겨울은 슬쩍 웃었다.


봄은 누구보다도 열심이었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수발을 들고 곁을 떠나지 않고 말벗이 되어드렸다. 손주뻘 되는 봄이의 말에 때로 할머니들이 맞장구를 치며 좋아하시는 모습을 겨울은 신기한듯이 먼발치에서 지켜봤다. 마지막 시간에 인사를 드릴 때에는 할머니들이 쌈짓돈을 챙겨와 봄이에게 주려고 하셨다. 진심으로 고맙다고..친구들이랑 식사라도 하라며..봄이는 땀을 흘리며 사양했고 어르신들이 그냥은 못보낸다하여 자양강장 음료 두어병을 챙겨야했다.


봄아 너 다시 보인다? 집에 어르신이 계시니?


겨울은 요양원에서 나오며 봄이의 옆구리를 장난스럽게 치며 물었다.


아..네. 할머니가 계세요. 할아버지는 돌아가셨고요. 저 예전부터 요양윈에 오면 이랬어요. 특별히 오늘이라고 달라진 건 없는데..


아..그랬나? 미안하네 그럼..


선배가 사과할 거 있나요. 지금이라도 좋게 봐주시면 감사한거죠. 선배는 저랑은 다르게 좋은 사람이라서..늘 주변에 사람이 있잖아요. 덕불고필유린이라고 하나요..(웃음) 그게..때로는 선배가 다른 사람을 보지 못하게 하는 병풍이 되기도 했죠..


겨울은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가 치매기가 있으세요. 심한 건 아닌데..손자로선 가슴 아픈 일이에요. 저도 할머니 손에서 컸으니까요. 언젠가 아버지가 할머니 요양원으로 모시려고 해서..제가 건방지게도 전래동화 고려장 얘기를 꺼냈어요. 어릴 때 아버지가 읽어준 얘기 아니였냐고. 할머니 요양원 보내시면 저도 나중에 아버지 그렇게 모실거라고..


겨울은 가벼운 충격을 받았다. 봄이의 효심은 진심이었고 상당히 도전적이었다.


아버지의 표정이 지금 선배의 표정과 비슷했어요. 약간 울림이 있었나봐요. 아직도 할머니는 저희랑 같이 살고 계시죠..


봄은 말을 이었다.


제가 좀 건방지다고 사람들이 느끼는 거 잘 알고 있어요. 사실 알면서도 잘 제어가 안되요. 특히 노력도 안하면서 다른 사람이 이룩한 성과를 깎아내리는 사람들을 보면. 하지만 거꾸로 얘기하면 전 노력하는 사람들, 그래서 작은 거라도 뭔가를 해낸 사람들을 존경해요. 저기 요양원에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들..자식들 키우느라 평생의 팔할을 바치셨을거에요. 정작 자식이 알아주지 않을진 몰라도 뭔가를 이루신거죠. 충분히 존경받으실 일이죠.


제가 운이 좋아 좋은 집에서 태어났고 부족함 없이 살고 있는만큼 사회적 책임도 져야한다고 생각하구요. 거창하게 말하면 노블레스 오블리제..편하게 얘기하면 양심의 일환..뭐 그런 거에요. 뜬금없지만 그래서 전 선배를 좋아해요. 어르신을 공경하고..아이들에게 진심이고..약자에게 약하고..강자에게 강한..전 의지를 갖고 노력하는 거라면 선배는 몸에 밴 선함이라고 해야하나..자연스러운 거죠. 저처럼 해야한다는 느낌이 아니니까..존경스럽고..좋아하고 그런겁니다.


겨울은 뭐라 말해야할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자니 저 멀리 미희가 오는 것이 보였다. 다행이다 싶어 뛰다시피 미희에게 다가갔다. 뒤에서 지켜보는 봄이의 시선이 느껴졌다..






작가의 이전글나는 달. 당신은 지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