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씨. 이즘 저한테 서운하지 않으세요?
겨울은 전화로 미안함을 전했다. 이즘 크리스마스, 연말연시 회사 안팎의 모임, 대학 동아리 행사 등 겨울의 시간은 평일 주말을 가리지 않고 붐볐다. 곧 해가 바뀌면 가족 행사로 바쁠 것이리라. 여름을 위한 짬을 내기가 어려워 마음 한 켠에 미안함과 아픔 같은 것이 있었다.
여름은 말이 없었다.
여름씨? 들려요?
네..겨울씨. 듣고 있어요. 죄송해요. 잠깐 먹먹한 느낌이 들어서..죄송해요.
아...
먹먹하다니..겨울의 불안한 마음이 배가됐다.
겨울씨. 그럼 혹시 월요일 팀 회식이..늦게 끝날까요?
팀장님이 무리하는 스타일 아니라서 평상시 회식은 9시면 끝나는데..연말 마무리 자리라..솔직히 기약은 없어요. 중간에 나오기도 좀 그렇구요.
맞아요. 연말 팀 회식은..저희도 그래요. 팀장님이 모처럼 기분 내시는 때죠. 그동안 회포도 풀어야 하고..게다가 저희 팀장님은 이즘 시대에 안맞게 노래 부르시는 걸 좋아해서..(웃음)
어머..정말요? (웃음)
네..발라드 광이십니다. 벌써부터 목 다듬고 계시는 거 보면 저희 팀 회식 2차는 이미 정해진 거 같아요. (웃음)
신기하네요. 여름씨. 저희 팀장님도 노래 좋아하시거든요. 사무실에서도 라디오 항상 틀어놓으시고..
그래요? 겨울씨 팀이랑 조인트해서 두 분 만 노래방 보내드리면 좋을 것 같네요. (웃음)
핸드폰 너머로 겨울의 웃음 소리가 들렸다. 한참을 웃더니 겨울은
왜요? 여름씨는 노래 부르는 거 별로에요? 전 두 팀장님들 따라가고 싶은데..(웃음)
아..그래요? 겨울씨 가면 저도 당연히 가야죠. 노래 좋아하기는 하지만 잘 부르진 못해요. 박치는 아닌데..제 목소리가 다소 저음이라..고음 처리가 잘 안되더라구요. (웃음)
그건 제가 해드릴게요.
네? 여름은 되물었다.
고음 처리요. 저 노래 부르는 거 좋아하거든요. 연극 하면서 발성 연습한 것도 꽤 도움 됐고..아마추어 뮤지컬은 없어서 아쉽다는 생각도 했었어요. 연극 동아리 하면서 제안했다가 구박만 받았죠..(웃음) 혹시 여름씨. 부르고 싶은 듀엣곡 있나요? 저랑 언제 한 번 같이 불러요.
상상만 해도 영광이네요. 벌써 두근거려요. 들려요? 제 심장소리?
네? 겨울은 또 소리내 웃었다.
여름씨. 그거 어디서 많이 듣던 대사에요. 불새였나..남주가 여주에게 뭐 타는 냄새 안나냐고 물었었죠.
맞아요. 통화중이니 냄새는 맡을 수 없잖아요. 소리는 들릴지도 모르니. (웃음)
다행이에요. 겨울은 밝은 기운으로 말했다.
뭐가요?
여름씨가 저한테 혹 실망하면 어쩌나..실망은 아니더라도 혹 낙담하고 있으면 어떻하지..여름씨 기운 추스리려면 뭐가 필요할까..그 고민했거든요. 근데 통화하면서..여름씨 조금이나마 기운 내 주셔서..조금은..아주 조금은 안도했어요.
처음엔..좀 힘들었어요. 겨울씨 잘못 아니고..누구의 잘못도 아니고..그냥 일이 그리 돌아가게 돼 있던 거죠. 마치 오래전 예약된 일정마냥. 그걸 받아들이기가..그게 힘들었어요. 겨울씨의 일정에 낄 자리가 없단게..비비고 들어갈 틈이 없단게..제가 이방인처럼 좀 무력하게 느껴지고..슬프고..좀 가라앉는 느낌..
하지만..겨울씨 음성 듣고는..그게 다 쓸데없는 감정 소모임을 직감했어요. 아까 제가 먹먹했다고 했잖아요. 겨울씨 첫 마디가 미안하다고..겨울씨가 절 생각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너무 고맙고..겨울씨도 어쩔 수 없는데..그래도 날 그리워해주고 미안해하는데..전 바보처럼 스스로 침울한 감정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으니..미안해할 사람은 오히려 저에요. 정말 미안해요. 심적으로 던 단단한 사람 못돼서.
여름은 눈에 눈물이 핑 도는 듯했다. 핸드폰을 잠시 멀리했다. 혹여 이번에야말로 내면의 흐느낌이 들릴까 싶어.
듣는 겨울도 슬프기는 마찬가지였다. 겨울도 잠시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숨을 고를 시간이 필요했다.
겨울씨. 생각났어요.
여름은 겨우 침착하게 입을 뗐다.
네? 무슨?
아까 말했던 듀엣곡. 남녀 듀엣은 아니고 여성 듀온데..일전에 드라마 OST였는데..괜찮아 사랑이야..라고 아세요?
아..알아요. 보진 못했지만요.
저도 띄엄띄엄 기억하거든요. 근데 아마 노래 들으면 아실거에요. 유명했으니까.
꼭 들을게요. 근데..왜 이 노래에요? 여름씨 최애곡인가요?
아뇨..전 제 18번이 뭔지도 모르겠어요. 그 때 그 때 바뀌어서. 이 노래는 제가 이번에 속초 가서 자주 들었던 노래 중 하나에요. 그 분위기에 취하면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무한반복해 듣는지라..영랑호수윗길에서..겨울씨 생각하며 내내 들었고..마지막 날 버스에서도..한번더 바다를 봤으면 계속 들었을거에요. 그게 좀 아쉬워요..물결과 어울리는 노래거든요. 멜로디가..파도가 저 멀리서부터 물결지어 오는 듯해요. 노래가 끝날 즈음 파도는 해안에 부서지며 사라지는..이상하게 그런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전화 끊자마자 듣고 싶네요. 파도, 물결과 어울리는 멜로디라..기대되네요.
(웃음) 느낌은 사람마다 다른 거니까..제 느낌을 겨울씨 스스로에게 강요하진 마세요. 듣는 사람 본인이 느끼는대로 듣고 불러야죠. 노래란게..
네..열린 마음으로 들을게요. 그럼 두 여성 듀오 중 한 명 파트를 여름씨가 맡는다는 거죠?
네..전 최대한 키를 올려보긴 할건데..역시 곡을 이끄는 고음은 겨울씨가 해줘야할듯요. 제 파트에서도 필요하면 같이 불러주심 좋구요. (웃음)
네 알겠습니다. 연습할게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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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퇴근 무렵이었다. 팀장은 오늘은 연말 회식일이니 조금 빨리 업무 마감하라고 팀원들에게 말했다. 사실은 월요일은 여름의 팀회식일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겨울에게 월요일 일정을 물은 것은 그나마 겨울의 남은 일정 중 저녁 시간을 조금이라도 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겨울이 된다면 여름은 무슨 수를 써서도 중간에서 나올 참이었다.
겨울의 팀은 예상대로 노래방으로 2차를 갔고 흥이 오른 팀원들은 팀장에게 마이크를 넘길 생각을 않고 노래를 불렀다. 옆에서 웃으며 지켜보던 겨울에게 팀장은 부르고 싶은 노래 없냐고..한 곡 하라고 권했다. 겨울은 여름이 함께 부르고팠던 그 노래를 불렀다.
꽃 흔들리듯 바람에 니가 다가와
내 맘 두드리던 그런 너를 사랑해
여름이 말하는 물결치는 듯한 멜로디가 무엇인지 겨울도 느끼고 있었다. 바람에 다가와 마음 두드린다는 부분을 부르며 겨울은 수년 전 여름이 매일같이 카페 매장에 찾아와 조용히 커피를 마시고 갔던 장면과 단 두번의 만남으로 나눴던 형언할 수 없던 교감들, 지하철 진동으로 우연히 잡았던 옷소매와 영화같던 재회, 그리고 그 후 최근까지 이어진 만남과 더 다가올 수 없는 여름의 슬픔까지..여름과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감정이 북받쳐서 음성이 떨렸다. 노래가 끝나고 뜻밖의 실력에 팀원들은 박수를 쳤다. 겨울은 노래방을 나와서 왜인지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그리곤 여름에게 전화를 했다..여름은 받지 않았다. 잘 들리지 않아 건물 밖으로 나와 다시 전화를 걸었다..여름씨 제발..겨울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하얀 입김이 피어나는 겨울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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