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vs 괴물

by 정자까야

병화야. 통화 되? 미안하다. 주말에..


아냐. 어차피 쉬고 있었어.


사실 여름은 병화에게 진작부터 전화하고 싶었다. 하지만 부탁한 것이었다. 재촉하고 싶진 않았다.


별 일 없지? 여름은 안부부터 물었다.


응. 그래. 넌? 애정 전선 이상 없고?


여름은 웃었다. 사귀는 것도 아닌데..그런 생각을 하면서.


병화야. 있잖아. 일전에 우리 얘기했던거..


그래. 안그래도 네가 전화 할 때 됐다 싶었어. 나도 그동안 애써서 알아보긴 했거든. 근데 딱히 전할 만한 일이 없어서 못하고 있었네..


그랬구나. 하긴..예상했던 일이긴 했지..


아버님 존함이 정 이자 수자 셨지?


그래..맞아.


내 일본 지인이랑 장인장모님, 아내에게 물어봤는데 들어본 적 없고 일본에서 도서관 가서 검색해봐도..특별한 기록이 없었나봐. 그래서 혹시 딸 이름으로 필명을 썼을지도 모르니까..겨울씨 이름으로도 해보고..겨울이라는 이름이 일본어로 '후유'거든. 그렇게 검색해도 없고..아버님이 일어를 원래 잘 하신게 아니라면..시집 발간은 어려웠을 것 같아. 소설이라면 몰라도 시는..그 언어의 가장 은밀하고 내적인 부분을 건드리는 영역이라 모국어가 아닌 사람이 접근하기 쉽지 않잖아..


그래.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아버님이 타지에서 초기에 정착하기도 어려웠을 것 같은데..모국어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시를 쓴다는 건..


그리고 일단 백데이터가 너무 부족해. 너도 그렇긴 하겠지만 내가 아버님에 대해 아는게 너무 없어. 유추해서 찾아볼만한 자료가 더 있음 좋겠는데 어머님 만나 여쭤볼 수도 없고. (웃음)


(웃음) 네가 겨울씨 네 번째 사람이라고 셀프 소개하고 좀 알현해라.


여름아..나 아직 애도 없는데 불륜으로 돌싱남되라고?


(웃음) 농담이고..내가 단편적으로 아는 걸 얘기해주면..아버님은 선생님이셨대. 국어 선생님.


아..시인이셨던 게 이해가 되네..


그리고..당연히 어머님은 선생님이실 때 만난건데..정확한 건 아닌데 아마 교생 하시다가 연이 닿으신 모양이야.


교생 선생님과 학생..존경이 사랑이 되고..뭐 그런 건가..


모르겠어. 인연이 그 때부터였던 거고..결혼은 수 년 후에 선생님 되고였을거야. 겨울씨 나이나 뭐 그런거로 추측하기엔.


아버님, 어머님 연세는?


역시 정확한 건 아니고..어머님이 예순 중순이고..아버님은 나이차가 좀 있으셨다고 했어. 10년 이상이었나..


예순 중순이시면 60년생 즈음이고..아버님은 50년생쯤 되시겠군.


정확하진 않아. 여름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알아. 우리한테 정확한 정보란게 어딨겠냐. 대충 아는거라도 절실한 상황인데..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 이런건가..


어머님이 사랑의 쓴 맛을 보셨고 그래서 그 반작용으로 자녀들에겐 철저히 현실적으로 됐다..이게 기본 테마지?


그렇지. 그 때 나 보셨을 때도 그러셨지. 잘못된 선택은 자기만으로 족하다고..여름은 괴로운 기억을 떠올렸다.


그래..네가 말했었지.


근데 그 말이 왠지 역설적이게도 희망으로 들리더란 말도 했었나? 어머님이 슬퍼보이시더라고. 너무 사랑해서 모든 걸 건만큼 그 부작용도 큰 거였는데..그렇게 걸어본 사람이 사실..별로 없잖아? 대충 조건 맞춰 짝 찾고 안주하는 시대니까. 걸어봤기에 그 마음을 이해할 수도 있겠다..적절한 계기만 있다면..


방황해본 신부가 방황하는 어린 양의 고해를 이해하는 격인가..


그런거지. 철저히 내 희망회로긴 하지만.


근데 그렇게 다 거는 과정에서 부모와의 트러블도 상당했을거고..부모형제 다 뜯어말리는데 뛰쳐나와서 결혼을 했으니 이후 부모와 관계 개선이 쉽지 않았을거고..


겨울씨 말이 외가댁 할아버지 뵌 기억이 별로 없이 돌아가셨고 할머니는 생전이시긴 한데 아직도 왕래가 뜸하다고..


그래. 어머님 인생도 회복 불가능할 정도였겠지. 행복하게 잘 살면 위안이 될텐데 그 와중에 남편은 빚쟁이가 돼서 실종되고..수년 후 외국에서 사망..IMF이후 어머님이 어떻게 두 자녀 키웠을지 안봐도 뻔하고..온갖 고생의 끝이 자수성가라 다행이긴 한데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삶에 대한 완고함이 자리잡았다..


정확해. 어머님을 이해할 수 있어. 충분히.

여름은 당시의 어머님을 다시 떠올렸다. 온갖 풍파를 견디신 인생 선배로서의 기품이 있었다.


근데 아버님은 왜 빚을 지신거야? 설마 재테크 같은 거 하시다가?


그건 아니고..97년 당시는 사회가 흥청망청 분위기긴 했지. 돈이 돈을 버는. 지금만큼이나 사람들이 돈에 미쳐있었나 봐. 아버님 형제 중에 사업 하시는 분이 있었는데 금융권 뿐만 아니라 사채도 쓰고 하셨나봐. 지금이야 거의 없지만 연대보증도 사회적 문제가 꽤 됐고..아마 아버님이 사채 쪽 보증을 선 게 잘못된 것 같아. 교사니 신원도 확실하고 해서..상대방이 요청한 걸 거절 못하신 게 아닐까..


그렇구나. 아버님 마음 고생이 보이네..사채면 독촉 전화 정도로는 끝나지 않았을테고..어쩌면 아버님 실종은 그거랑 관련 있을지도 모르겠다..


병화는 잠시 생각하다


여름아. 아버님이 시집 내셨다고 했지? 혹시 본 적 있어?


응. 겨울씨가 한 번 가져온 적 있었거든. 두 권이었는데 시집 제목이 지명이었어. 강릉..그리고 평창이었나..그랬을거야.


강릉? 평창? 강원도 강릉, 평창?


그렇겠지. 아버님에겐 일종의 심적 고향같은 곳이었나..


지명으로 시집 타이틀을 잡으셨구나..


왜? 뭐 짚이는 게 있어?


아니..혹 일본에서 시집을 그 곳 지명으로 하셨으려나..그런 생각이 스쳐서..


아..그럴 수도..

여름은 집요한 병화의 궁금함이 고마웠다.


시집 찾아봤는데 절판된지 오래고 출판사도 중소 규모였는지 폐업하고 없더라. 겨울씨도 엄마 몰래 갖고 나온거라 차마 빌려달란 말은 못하겠고 겨울씨 통화하는동안 재빨리 훑어보고 눈에 띄는 시 하나 핸드폰으로 찍어놓은거 있는데 읽어줄까?


그래? 잘했네..좀 많이 찍어놓지 그랬냐..


그러게..그 땐 이렇게 필요할 줄 몰라서..제목은 괴물이야..


괴물?


응. 읽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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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새댁이

손으로 눈을 치켜뜨고 입을 벌리고

유모차 안 아기를 위해 기꺼이 괴물이 된다


세월이 흘러

어린 새댁은


아기에게

좋은 학교, 좋은 친구를 선물하려 이사를 하고

아기가 다칠까봐

일거수일투족을 코치하고

바쁜 아기를 위해

꿈과 진로를 대신 고민하다


다른 이름의 괴물이 되었다


아가야

넌 그립지 않니

네 웃음이 행복의 유일한 이유였던

한 때 너무도 순수했던 괴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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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화는 잠시 침묵하다 말했다.


좋은 시네. 시류에 비판적이기도 하고. 좋게 말하니 교육열이지..좀 심하긴 하지. 한국은..애들 잡는 수준이니. 아버님 살아계셨으면..좋은 선생님이 되셨을 것 같다.


그래. 직설적이고 담백한 글이야. 살아계셨으면..나한테 힘이 돼 주셨을 것 같아..


확실히..하지만 그럼 넌 겨울씨랑 인연이 안닿았을지도 모르지. 현재는 모든 과거의 총합이니..하나만 달라져도 전혀 다른 현실이 됐을지도 모르니까.


겨울씨 없는 현실이라..

여름은 읊조렸다. 자신은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있을까 생각하면서.


여튼 글을 보니, 한 편으론 단정하긴 뭐하지만, 글에서 드러난 아버님 성향은 사군자 느낌이야..절도가 있는 삶, 곧고 바른 걸 추구하는.


부동산, 주식, 코인..돈 돈 하는 요즘 세대와는 확실히 결이 다르긴 하지. 이즘 카페 가면 어디든 그런 얘기 뿐이야. 아이들이 좋아하는 게 뭔지..학교에서 있던 에피소드에 대해 얘기하는 학부모는 본 기억이 없어..죄다 영어유치원 어디가 좋은지..학군지 어디로 가야한다느니 거기 아파트 값이 얼마느니..애가 공부를 못해 고민이라느니..그런 얘기들 아니면 재테크 얘기.


여름아..그게 우리 미래일 수 있어. 나중에 내가 그런 얘기 해도 너무 나무라지 마라. (웃음)


(웃음) 난 결혼이나 할 지 모르겠다.


그래. 오늘 얘기 정말 유용했어. 너무 막막했는데..멀리 등대를 본 것 같기도 하고..다른 방향으로 찾아봐도 없을 가능성이 크지만 한 번 더 해보자.


그냥 너무 고맙다...다른 할 말이 없네..


술이나 한 잔 사. (웃음) 여름아..나 아내가 불러서 가봐야겠다..


그래. 고맙고..또 연락할게.


여름은 전화를 끊고 잠시 생각했다. 내게 아이가 있다면..난 끝까지 순수한 괴물로 남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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