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오전 근무를 끝으로 한 해 업무를 마감했다. 다음 출근일에 할 일을 간략하게 메모한 후 동료들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말을 전했다.
자주 가던 헤어샵에 들렸다. 생각보다 붐비는 매장. 예약하지 않았다면 오늘 머리하기는 어려웠으리라.
연말은 연말인가 보네요. 항상 문 닫을 시간에나 오시더니. 변호사님이 오후에 웬일이세요?
가을이 항상 예약하고 오는 원장님이 웃으며 말을 건넨다.
아..오늘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요.
업무 미팅은 아니실테고..선 보러 가세요? (웃음)
가을은 가벼운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선이라..하긴 서른이 넘어서 만난 사람들은 다 선인 셈이다..가을은 일년여 전 겨울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자신의 재미없는 얘기에도 자주 웃어줬던 사람. 가을은 이성과의 대화에서 종종 어려움을 겪곤 했다. 대화는 어느새 독백이 되기 십상이었다. 진지함을 덜어낼 필요가 있다고 늘 생각했다. 겨울을 만난 뒤에는 고민이 상당히 줄었다. 겨울은 진지한 대화도 넉넉하게 받아냈고 너무 무겁지 않도록 잘 마무리했다..
오늘, 올 해의 마지막 날 가을은 겨울의 친구들을 만난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고민해봐야 답도 없는 일로 오전 시간을 보냈다. 어차피 대화는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흐를 것이다. 성실하고 진지하게 임하자..평소의 나처럼. 그게 가을이 내린 결론이었다.
안녕하세요? 현가을입니다. 겨울씨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경희와 미희. 미희는 미혼에 연애도 쉬는 중. 겨울이 연말로 날짜를 잡았을 때 별 거부감은 없었다. 문제는 경희였다. 결혼한지 한 달 남짓인 신혼에게 가당찮은 날이었다. 남편이 곧 출국 예정인 친구와 약속을 잡기 전까지는.
어렵게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연말이라 다들 쉽지 않으셨을텐데..
친구들은 으레 묻는 질문들..가령 어떻게 만났냐느니, 겨울을 어떻게 생각하냐느니 그런 걸 물었다. 이미 알고 있지만 친구가 아닌 상대방에게 듣는 건 또 다른 얘기였을 것이다. 가을은 대화 내내 공손했고 바른 대답을 했다. 친구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 생각 있으신거죠? 미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요..전 준비됐습니다. 부모님도 알고 계시구요. 기회가 되는대로 겨울씨 어머님 뵈려 하고 있습니다.
겨울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
겨울이에게 얘기 들으셨죠? 어머니가 좀..어러울실 수도 있어요. 살갑진 않으셔서..저희도 아직 어려운데 초면이시면 더 그러실거에요.
네..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선택은 겨울씨가 하는 거니..겨울씨가 제 편이면 어머님 마음에 들게 노력 못하겠습니까. 자식 이기는 부모 없으니까요.
겨울은 속으로.. 그런 경우도 있다고 푸념조로 말했다.
가을씨는 연애 많이 해 보셨나요? 경희다운 질문이라고 겨울은 생각했다.
아..아뇨. 친구분들께는 좀 답답하게 보이실 순 있는데..남고 다니다보니 그런건지..숫기가 없어서..대학에서도 별 거 없었고..로스쿨 이후 최근까지는 공부하고 자리잡고 하느라..선은 좀 봤는데..누굴 진지하게 만난 건 겨울씨가 처음입니다.
정말이요? 과거를 숨기는게 맞다고 조언 들으셔서 그런건 아니시죠? (웃음)
아뇨..전혀요. (웃음) 그런 조언해줄만큼 선수도 친구 중엔 없습니다.
바른 생활 사나이시네요. 아..비꼬는 거 아니구요. (웃음) 겨울이가 항상 배울 점이 많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했는데..어떤 말인지 알겠어요. 진지하고..젠틀하시니.
아뇨..전 그게 잘 산건지 의문입니다. 성격이 그래서..조용하고 친해지려면 시간이 필요한 타입이다보니..그게 편하긴한데..사회 생활이 좀..오히려 겨울씨같은 성격이고 싶어요. 붙임성 있고 밝고..진지할 때 진지하지만 웃음도 많고 유쾌해서..옆에 있음 같이 밝아지잖아요. 제 롤 모델입니다. (웃음)
겨울이는 연애도 많이 했어요. 미희가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겨울은 그저 웃었다.
아..네 대략은 들었습니다. 전 뭐 그런건 개의치 않아요. 말했듯 저도 그렇게 살았음 좋았겠다..생각하거든요. 부러워요. 성격상 그러질 못해서..
그러다가 경희의 신혼 생활 얘기가 나왔다.
경희씨는 애들 많이 갖고 싶으세요? 가을은 두 친구들 역시 겨울처럼 천성이 착한 이들같다 느꼈다.
네..맘 같아서는 한 대여섯 낳고 싶은데..나이도 있고..남편이 난감해해서..(웃음) 그래도 둘은 나으려구요. 상황 봐서..셋까지..
대수롭지 않은 대답에도 겨울과 미희는 입을 막고 웃었다. 둘에게 경희는 유재석급 입담가였다.
가을씨는 애들 좋아하시나요? 미희가 물었다.
가을은 겨울을 슬쩍 보고는 다소 조심스럽게 답했다.
전 하나라도 잘 키우자..그런 생각인데..아 그게 경희씨가 막 키운다는 얘긴 아니구요. (웃음) 제가 여러 애들을 다 잘 케어할 자신이 없어서..조카들 보면 귀여운데 그건 조카니카..제 얘라면 조카들 보는것만큼 가볍게 볼 순 없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힘에 부치지 않을까..
겨울도 이런 얘기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둘은 아직 같은 미래를 그려본 적이 없고 당연히 이런 성격의 대화를 나눌 이유도 없었다. 둘의 나이가 있으니 친구들과의 대화도 그리 흘러갈만 하다고 이해는 됐다. 그래도 관계에 비해 대화가 너무 진전된 느낌이 없지 않았다.
가을은 자신의 직업 얘기, 가족 얘기를 주로 들려주었다. 친구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무리없는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디저트까지 먹고 경희와 미희는 먼저 일어섰다. 겨울은 전화하겠다고 말하며 둘을 배웅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경희는 좋은 사람 같다고..적어도 외도 같은 걸로 널 아프게 할 타입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근데 겨울이가 좀 심심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미희는 한 마디 했지만 걱정하는 투는 아니었다.
뭐..결국 결혼은 현실이니까. 연애할 때야 좋지. 결혼하면 그 인간이 그 인간이야..
경희는 벌써 결혼 몇 년차는 된 것처럼 말했다.
경희야..너 꼭 겨울이 엄마같아..미희가 말하자 셋은 자지러지게 웃었다. 그래. 겨울이 엄마에게 결혼한 사내란 다 그놈이 그놈일 것이니..미희의 농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겨울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친구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돌아와 가을과 오늘 모임에 대해, 친구들에 대해 얘기했다. 가을은 친구들이 모두 겨울을 닮아 멋지다고, 유유상종이라더니 그 말이 맞다고 웃으며 말했다. 무엇보다 겨울의 절친들과 대면한 사실 자체가 좋았다. 큰 걸음을 내딛은 느낌이었다.
겨울은 이미 친구들에게 부탁했었다. 가을, 여름, 그리고 봄이까지 차례로 만나달라고..
봄이까지? 경희가 의외라는 듯 큰소리로 물었었다.
기회를..줘야하지 않을까..몇 년을..날 위해 기다린 아이잖아..
겨울은 친구들의 도움이 절실했다. 자기로서는 온전히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을지 혼란스러웠다. 무엇보다도..엄마에 맞서야 하는 상황이 오면 자신이 끝까지 그럴 수 있을지..지금까지도 할머니와 등지고 사는 애처로운 엄마처럼 자신도 그렇게 살 수 있을지..자신할 수 없었다. 친구들을 소개한 이유를 겨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친구들이..엄마와 맞설 자신에게 힘을 주길 바란건지..아니면 엄마의 조언을 따를 자신의 미래에 면죄부를 받기 위함인지.
가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문득 몇 달 전 수정 언니의 말이 생각났다. 자신의 혼돈은 어쩌면 '정해진 망설임'일수 있다는.
정해졌다..누구에게? 누구쪽으로?
겨울은 물었다.
정겨울..넌 도대체 누굴 응원하고 있는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