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리안이 안내하는 그 감각의 매뉴얼
잊지 못해.
술기운에 이끌려 마주했었던 둘의 첫날밤.
사실 술 한잔 부딪히기도 전에 취했지.
사무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타블로의 목소리가 반가웠는지 나도 모르게 귀가 기울여진 어느 날. 별 뜻 없이 듣다가 그런 생각을 했다. 아니, 술 한잔 부딪히기도 전에 취한 거면 얘네는 도대체 어디에 취한 거야.
물론 나로서는 술에 취하는 날보다 분위기에 취하는 날이 많다. 분위기 만드는 이 조명, 온도, 습도, 그리고 향기. 이 좋은 햇살에, 한 겹만 입기 딱 좋은 날씨에, 어제까지 비가 와서 촉촉해진 공기에, 그리고 불어오는 밤 냄새에- 우리는 어김없이 어깨 쪽으로 고개를 떨군 채 힘없이 몸을 늘어뜨리고 만다. 어디에라도 마음을 내어주기 좋은 무방비 상태다.
마주한 눈빛에 마음이 쏠려 넋을 빼앗긴 사람. 머리칼을 넘길 때마다 밀려오는 샴푸 냄새에 정신이 흐려지고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게 된 사람. 자꾸 생각나는 실루엣에 얼이 빠지다시피 된 사람. 사실 그들은 모두 누군가에게 취했다. 국어사전의 풀이대로 점잖게 썼지만, 속된 말로 그냥 제정신이 아니다.
무언가에 ‘매료된’ 순간이 언제였던가. 그리고 내가 누군가를 매료시킨 순간도 있었던가. 이따금 향기로 기억되는 사람을 만난다. 스치는 향에 이끌려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경험이 있다. 누군가에게 매료되었던 순간이 나에게도 있다는 사실은 행운처럼 다가온다. 누군가와의 만남에서 어떤 향기가 마치 그의 시그니처처럼 자리 잡으면, 그의 존재감을 느끼기 전에 이미 그의 향기만으로도 취해 있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 행운을 가져다준 향기의 정체를 알게 된 날, 부정할 수 없는 매력에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술 한잔에 천천히 취하듯, 킬리안의 향수는 나를 서서히 매혹시켰다. 한 번 빠지면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농밀한 유혹의 향기. 단순한 향기를 넘어, 그 안에 숨겨진 감각적이고 도발적인 스토리로 우리를 끌어당긴다. 킬리안은 특별한 순간을 맞이하기 전, 야심 차게 꺼내 드는 자신감처럼 느껴졌다. 마치 유난히 반짝이는 밤을 위해 술잔을 드는 그 순간, 그 장면의 모든 매력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처럼.
그 시작부터 술과 뗄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킬리안은 술 한 잔의 취기처럼 그 자체로 대담하고 매혹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사실 술 한잔 부딪히기도 전에 취했던-‘ 경험을 선사한다는 뜻이다. 전통 있는 코냑 제조 가문에서 태어난 킬리안 헤네시는 고급 리큐어가 가진 고유의 감동을 향기 속에 담아 킬리안이라는 브랜드를 만들어냈다. 대담하면서도 섬세하고, 고혹적인 매력을 지닌 향수들이 술과 향의 경계를 넘나든다. 마치 술잔 속에서 느끼는 그 묘한 설렘처럼, 킬리안 향수는 우리가 평소 쉽게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한 순간을 만들어낸다.
일명 ‘여자 꼬시는 향수’로 알려진 엔젤스 셰어(Angel’s Share). 별명이 그게 뭐냐 싶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혀끝을 달콤하게 감싸는 터치와 코끝이 아릿해지는 스파이시함, 내면에서부터 무언가 뜨겁게 올라오는 감각까지. 술을 표현한 향수에서 흔히 느낄 수 있는 퇴폐적인 무드대신, 바닐라의 달콤함과 시나몬 스틱의 알싸함이 은근하게 섹시함을 발산한다.
그윽한 오크우드가 진하게 밴 코냑은 마치 정성스러운 세월을 맛보는 듯 황홀한 감상을 준다. 위스키를 오크통에서 숙성시키는 동안 매년 약 2%의 술이 자연적으로 증발하는데, 위스키 제조업자들은 조금씩 줄어드는 위스키를 보며 증발된 알코올과 수분에 천사들의 몫(Angel’s Share)이라는 이름을 붙인다고 한다. 오래 숙성할수록 당연히 술의 양은 줄고 엔젤스 셰어는 커지는데, 그만큼 진해지고 비싸지는 술의 감동은 잔을 기울이는 장면의 낭만과 비례하리라 짐작해 본다.
지금 딱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면, 속는 셈 치고 한번 뿌려보자. 구어망드(gourmand) 계열의 달콤한 미식의 향기가 본능적인 욕구를 자극하며, 어딘가에 입을 갖다 대게 만드는 스킬은 확실하다. 결과는 천사들의 몫으로 맡기는 걸로.
술 한잔하자는 말은 너무 의도가 다분한가. 그럴 땐 의도를 숨기고 반전의 재미를 만드는 편이다. 바람에 펄럭일 때마다 살결이 얼핏 드러나는 홑겹의 순백색 옷차림 같은 거 말이다. 보일 듯 말 듯 은근한 시그널과 마냥 화사하고 달콤한 꽃향기의 밸런스가 말도 못 하게 치명적인 발칙한 향수가 있다.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과 악을 알게 된 그 소녀를 주인공으로 삼은 향수, 굿걸곤배드(Good girl gone bad).
순간, 모든 소음이 차단되고 상대의 눈꺼풀만 천천히 감겼다 뜨는 듯한 감각이 느껴진다.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은은하게 퍼지는 샴푸 향이 아득하게 다가오고, 설탕에 절인 복숭아와 오스만투스, 튜베로즈, 장미의 흰 꽃잎들이 휘날리는 장면이 그려진다. 진한 복숭아 향을 풍기는 향수는 묵직하고 진득한 질감이 많은데, 흔치 않게 가볍고 차가운 샴페인처럼 톡 쏘는 매력도 있다. 깊게 들이마시면 느껴지는 깨끗한 살갗의 알싸함이 페미닌한 매력을 극대화한다.
가까이 다가가야 은은하게 발향되는 이 향수는, 은밀하게 가까워지면 순간적으로 매혹적인 향을 남긴다. 그 순간 귓가에 속삭이는 소유욕은 덤. 다른 사람 만날 때 뿌리면 불안할 것 같다는 말이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었다-는 후기는 더 이상의 설명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 스치는 손등의 감촉이 쾌락의 전부인 시기를 기억하는가. 둘만 남은 길은 늘 짧게만 느껴지는 법. 말없이 걷는 동안 어깨가 스칠 듯 말 듯, 몸의 거리보다 마음의 거리가 훨씬 가까웠던 그 시절은 모든 게 조심스러워서 더 소중했던 순간으로 기억된다. 옅은 달빛 아래에서만 피어날 수 있었던 감정이 있다. 우린 그걸 풋사랑이라 부르기로 했다.
온갖 사랑이 꽃피는 여름밤, 후덥지근한 기운이라곤 전혀 없이 춥지 않은 적당한 밤에 역사는 빠르게 기록된다. 잔잔한 밤공기 사이로 코끝에 맺히는 건 망고의 달콤함, 그리고 어딘가 낯선 코코넛의 이국적인 잔향이었다. 간간이 새어 나오는 웃음과 침묵만이 번갈아 이어지던 그 밤에도 우린 어김없이 나란한 어깨로 같은 길을 몇 번이고 걸었다. 손등이 닿는 아찔함에 괜히 손을 들어 올려 부채질하는 순간, 그가 덥석 손을 잡고 말했다.
“이 향수 뿌리면 플러팅으로 이해할게요?”
당장에라도 그를 끌어안고 싶어 두근거렸던 밤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강렬한 자신감을 전달해 준 향기. 풋사랑의 감정처럼 아련하고 순수한 문라이트 인 헤븐(Moonlight in Heaven), 감정의 밀도가 깊어지는 순간을 포착한다.
킬리안은 향기는 물론 이름과 보틀, 패키지까지 모든 요소로 우리를 유혹한다.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 서사 위에서 관능적이면서도 섬세한 매력을 발산한다. 향수 한 병을 통해 술 한잔보다 더 깊고, 그 어느 설렘보다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를 원한다.
밤이 깊으면, 눈을 감으면, 숨을 깊이 들이마시면 더 짙어지는 감정에 취한 이 기분이 싫을 리가 없다. 하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포인트는, 우리는 술 한잔 부딪히기도 전이라는 점이다. 킬리안의 향수가 만들어낸 순간 속에서 우리는 알콜 한 방울 없이도 거나하게 취한다.(사진 출처=퍼퓸그라피 자사몰)
Editor. Sonior
향수 브랜드 에세이를 기록합니다. 글에 등장하는 향수는 퍼퓸그라피 자사몰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