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한 조간 신문에 실린 사설이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469/0000895277?sid=110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그러나 누구도 속시원하게 바꿀 엄두를 내지 못하는 일이 지역 의료의 붕괴와 의료의 서울 밀집 현상이다. 배운게 도둑질이라, 병원 내지는 의료 정책에 대한 부문에 꾸준히 관심을 두고 있는데 이 상황에 대해 한 번 말해보고자 한다.
1. 서울 편중 현상은 급여, 중증도, 이른바 배울 것이 결합된 시장 선택의 결과다.
간호업계를 예시로 들자면 많은 간호사들이 외국간호사를 꿈꾸곤 하는데 그 바탕은 1인당 환자 수나 업무 강도도 있지만 주된 요인은 고액의 연봉이다. 세계 어느 곳에서나 간호사의 업무는 대개 비슷하지만 처우의 스펙트럼은 다양하다. 표면적으로 높아보이는 연봉은 실상 해당 도시에서 살아가는 비용이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외국 간호사로 떠나는 경우 대개 미국이나 캐나다로 진출하는데 해당 지역의 주거비는 높은 것으로 유명하다. 급여의 40% 넘게 렌트에만 들어가는 경우도 심심치 않다.
국내의 이야기로 돌아오면 주거비와 식대에 있어 비수도권에 비해 수도권이 압도적으로 높은 금액대를 형성하고 있다. 생존에 필요한 비용이 급여에 반영된다고 가정하면 언제나 서울이 지역 병원에 비해 높은 급여를 지급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기숙사를 무료나 저렴하게 제공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또한 어느정도의 규모를 갖춘 병원일때라야 가능하다. 그런 경우 주거비 부담까지 덜게 되니 수입은 더 늘어난다. 소득의 부분을 고려할 때, 서울로 몰려드는 일은 자연스럽다.
중증도와 커리어적 이점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위의 사설에서 지적하는 41%의 외지인 환자의 질환은 중등증 내지 중증일 가능성이 높다. 서울의 의료수준이 높아져서 환자가 오는 것인지, 환자가 몰리기 시작해서 서울의 의료가 고도화됐는지에 대해서는 닭이나 달걀이나의 문제처럼 단언하기 어렵다. 다만 확실한 것은 몰리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증례가 쌓이고 환자들이 가진 막연한 기대의 밑바탕이 되었다는 점이다. 비단 간호사 뿐 아니라 의사의 경우도 중증 환자를 얼마나 겪었는지가 개인의 경쟁력이 된다. 백날천날 감기환자만 보던 이비인후과 의료진이 두경부 질환을 능숙히 다룰거라 기대하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그러니까 학구적인 목표나 연구의지가 타오르는 경우 제외하면 점차로 워라밸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기 마련이다. 그럴 때 그간 쌓아온 커리어와 경험들은 가장 빛나는 경쟁력이 된다. 우하향을 막을수는 없지만 처우의 기울기 변화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이왕 구른다면 초반에 험한데서 구르자는 마음가짐이 모두에게 조금씩은 있다. 발자취를 가꾸는 관점에서도, 서울로 몰려드는 일은 전혀 어색함이 없다.
2. 그렇다면 시장 선택의 결과인 만큼 놔둬야 하나, 그건 아니다.
시장의 원리는 선택이 모여 만들었다는 과정에 대해 납득시킬 뿐 결과의 타당성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1+1이 2이라는 등식은 당연한 이치이지만 왜 2여야만 하는지, 1이 아니라 2를 두 번 더할 수는 없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가 없다.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하나의 집단, 사회를 만든다고 가정할때 당연히 들어가야 할 의료기관. 그게 지금 지역에서는 당연히 존재하지 못하고 있고 많은 환자들이 원정 진료를 오고 있다. 수요와 공급, 개인의 이점에 따라 서울로 몰리는 일이 자연스럽듯 이 불균형이 부당하다고 보는 일 역시 자연스럽다.
3. 많은 매체에서 이 현상을 해결할 실마리로 지역발전을 거론하는데 나 또한 그 의견에 동감한다. 다만 그 균형 발전이라는 것이 어디부터 시작해 무슨 진전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정부의 청사를 세종시로 옮기면서 우리나라의 무게추를 중심으로 옮기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지만 지금 세종시는 공실 투성이고 서울의 과밀화는 그대로다. 몇몇 공무원들은 고속철도를 이용해 통근하기도 한다. 서울내에서 머무르는 효용이 서울 밖으로 나갈때보다 여전히 크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서울을 나선 후에도 서울에 있을 때 만큼의 편의성이 보장될 때 지역균형은 비로소 가능하다. 지역균형을 외친지 적어도 10년은 넘은 것으로 보이지만 피부로 느껴지는 변화는 없다. 사람들의 사회적 반응은 빠른 편이라 애써 목줄을 끌고 데려다 놓지 않아도 마음이 동하면 움직이기 마련인데 서울을 떠난 인구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러니, '지역균형발전'을 통해 의료 집중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은 '나중에 밥 한번 먹자'는 기약 없는 약속처럼 들린다. 다만 지역에 사람들을 모이게 할 이유를 만들면 의료의 집중 문제도 자연스레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일은 전적으로 나랏님에게 적합하다.
나아가 의료종사자를 어떤 숭고한, 희생에 바탕한 서비스업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거둬야 한다고 본다. 의정갈등이 불거질때 가장 많았던 비판은 밥그릇 챙기느라 여념 없다는 것이었는데 이 말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대단히 이질적인 말처럼 보였다. 근본적으로 모든 직업은 자신의 기술 내지 물건을 팔아 이윤을 창출하는 방식이다. 밥그릇을 챙기는건 남이 아닌 오롯이 자신이라야 맞다. 문제의 핵심은 밥그릇을 챙기는게 아닌 독점적 권한을 이용한 대화 거부와 환자를 볼모로 잡는 행위였다. 그러나 잘못된 표출 방식 대신 이익 추구라는 동기에 대해 분노하는 현상의 기저에는 의료인에 대한 편견이 녹아있다고 본다. 생명과 밀접하기에 높은 윤리와 도덕 수준이 요구되고 다른 직업군에 비해 커다란 책임이 부여되는건 사실이지만 저들은 성인군자가 아니다. 돈을 밝힌다며 손가락질 하는 이면에는 일반 사람들에 비해 윤리적으로 나은 사람일거라는 막연한 우러러봄이 있다. 책임에도 불구하고 의료진에게 있어 의료기술은 여전히 개인에게 벌이를 가져다 주는 매개의 의미가 더 크다. 열정페이나 임금체불을 비난하면서 의료진에게 수입 대신 직업윤리를 앞세우라 말하는 일은 자기분열적이다. 이런 모순과 몰이해가 쌓이면서, 손쉬운 유인책 대신 병원의 선의에 기대는 허송세월을 만든것으로 보인다.
강아지를 훈련시킬 때 훈련사의 손에는 늘 간식이 쥐어져있다. 하지 말라고 야단을 치는 것보다 옳은 일들을 했을 때 격려하는 방식의 훈육, 부정강화에서 긍정강화로의 흐름 변화는 20세기의 교육과 21세기의 교육을 나누는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다. 보상의 강화가 목표 달성의 가장 쉬운 길이라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안다. 근데 왜 그 원리는 의료인에게 적용되지 않는가? 이 사태를 극복할 첫 단계는 의료인에 대한 편견을 깨는 일일 것이다. 내 몸이 고장났을때 수리해주는 기술자 정도로 본다면 실망할 이유도 없다. 비수도권에서의 진료에 대해 수도권에 준하는 요양급여액을 지원하거나 의료기관 부족을 겪는 지역에 한해 수가를 조정하는 방식은 고려해봄직한 보상 강화라 생각한다. 병원을 꾸리고 운영하는 주체가 의료인인 만큼 보상으로 휘감아 서울 밖으로 나갈 당위를 만들어 준다면 너 나 할것 없이 서울 밖으로 나설테고 수도권 집중의 폐해는 곧 옛말이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