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딸
나는 3남매 중 둘째 딸이다.
나의 유년기는 그다지 행복했던 기억이 많지 않다.
유아기 때는 부유했다지만 딱히 기억이 나지 않으니 유복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랐다고 할 수 있다.
그 시절 흔한 배경이지만 그렇다고 그 배경이 그때의 나에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
부모님의 결혼 후 급작스러운 사업성공과 그보다 더 급작스러운 사업실패, 그로 인해 날카로워진 부모님의 부부싸움, 비참해진 가정 내 분위기, 모든 돈을 잃고 심지어 빚을 짊어진 채로 갈라져야 했던 우리 가족들은 누구나 예상하듯 행복하지 않았다.
아빠는 어떻게든 사업을 다시 일으켜 세워보겠다고 서울 큰아버지댁에 남아있었고, 언니는 다니고 있던 고등학교에 남아 친구집에서 지냈다. 엄마와 나, 동생은 대전에서 큰삼촌이 운영하던 중국집을 인수받아 그곳에서 지냈다. 그 당시 내 나이는 만 11살, 늦가을이었다.
엄마는 평생 해보지 않던 식당일을 처음 해보았고, 외숙모의 도움으로 중식요리를 하게 됐다.
소위 부잣집 사모님에서 중국집 요리사 겸 사장이 되었는데, 그 격차를 엄마는 필사적으로 적응하고 버텨낸 것 같다. 사실상 부자이던 시절은 그렇게 길지 않았으니 힘들었겠지만 어렵지 않았으리라. 다만 부모님의 필사적인 몸부림에 우리 남매에게는 소홀해짐이 뒤따랐다.
그중에서도 둘째 딸인 나에게는 알아서 잘하겠거니 하는 믿음만 굳건해지셨다. 왜일까? 그때의 나에게서 무엇을 보셨을까? 아이러니하게도 그 믿음으로 나는 정말 스스로 알아서 하는 아이가 되었다. 그 과정이 평탄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엄마는 장사하느라 정신없으셨고, 동생은 너무 어렸다.
어쩌다 오던 언니와 아빠는 그다지 나에게 큰 관심이 없지 않았을까?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쩌다 오게 되는 이유와 목적이 있었을 것이고, 그게 돈이라는 거에는 의심이 없다.
언니는 성인이 되고 미용을 배우며 일하다가 대전으로 내려와서 백화점에서 여성복 점원으로 일을 했다. 그렇게 언니는 자리를 잡아갔다.
아빠는 결국 모든 사업을 접고 대전으로 내려와서 엄마와 함께 중국집을 운영했는데, 오토바이를 타며 배달일을 했다. 아빠는 이 모든 것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적응하는 데에 어느 가족보다 오래 걸렸고 마음에 병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가장으로서의 미안함일까, 그저 한 남자의 자존심이 상한 문제일까?
뭐가 되었든 그때와 지금의 나로서는 아빠가 안타까울 뿐이다. 끙끙대며 세상을 부정하고 인정하지 못할 그럴 시간이 없는데, 장사하며 벌고 있는 돈이면 그때처럼 부자는 아니겠지만 아주 가난하지도 않아서 그럭저럭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이렇게 혼자만 무너져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물론.
아빠가 어린 나에게 물었던 게 아직도 가끔씩 떠오른다.
"우리가 중국집 하는 게 부끄럽니?"
"아니? 그게 왜? "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아빠의 그 질문으로 나는 중국집하는 우리 집을 잠시간 아주 약간은 부끄러워했던 것 같다.
그리고 부끄러움은 내가 아니라 아빠가 느끼고 있구나 싶었다. 그래서 실망했던 것 같다.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남의 집에 얹혀살며 눈칫밥 먹는 것도 아니었는데(월세이긴 했다.) 왜 부끄러워서 열등감을 갖으며 남에게 패악질을 하고 가족에게 피해를 주는지. 그걸 또 왜 나한테까지 전도하려는지. 실망하고 원망했지만 아빠를 싫어한 건 아니었다. 그렇게 괴롭고 힘들지만 어디 멀리 간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가끔 부부싸움할 때는 제발 이혼하길 바랐던 적도 있었다.
부모님의 끝없는 부부싸움으로도 나는 용케도 사춘기를 안전히 보냈다. 그렇게 나는 알아서, 스스로 제 갈길을 찾아갔다.
반면에 남동생은 그러지 못했다.
부모님은 동생에게는 그저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이 있었나 보다. 실제로 몇 년 전에 엄마한테 왜 이렇게 동생을 더 위하냐고 물었는데, 엄마가 "너랑 언니는 돈 많았을 때 다 해줬잖아, 근데 동생은 그랬던 적이 없었으니까 그렇지"라고 했었다. 그렇다는 건 아픈 손가락이 동생이라는 인정이었다.
부모님은 동생이 하고 싶다는 건 어떻게든 해주고 싶어 했다. 학원 가고 싶다고 하는 것도 눈치 보던 나와 다르게 동생은 태권도학원을 다년간 다녔고, 축구하고 싶다는 동생을 위해 아빠는 시간을, 엄마는 돈을 투자했다.
그게 나의 서운함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서운함 또한 내비치지 못하고 아주 잘 억눌러왔다. 그래서 그런지 얼마 전에 나도 나이가 드는지 엄마한테 서운한 일이 있었을 때 참다가 아주 조금 내비쳤다. 그거에 충격을 받으셨는지 며칠 서로 서먹했었지만 결국 다시 나의 인정으로 받아들였다.
아빠는 동생의 아빠, 엄마는 내 딸의 할머니. 늘 그렇듯 나는 스스로, 알아서 살아가야지. 그나마 남편이 있어서 다행이랄까.
반면에 엄마는 나의 서운함이 억울하셨나 보다. 아빠가 전하기를, 엄마가 나의 서운함에 더 서운해하셨다고 한다. '내가 지를 어떻게 키웠는데.'라고 하셨다던가.
물론 부모님의 희생에 감사하고 존경한다.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정말 열심히 사셨으니까 그 덕에 내가 잘 버티고 살고 있는 것이 아니겠나.
둘째 딸은 참아야 한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그게 그렇게 됐다. 게다가 유복하지 않은 집안의 둘째 딸은 더더욱 참고 참아야 한다.
사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왜 그렇게 살아왔는지 후회스럽다.
지금 와서 보면 그렇게 참지 않아도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투정도 부리고 했어야 했다.
아빠의 사업 재도전과 실패로 인하여 우리 집 재정적 위기는 나의 고3시절에 다시 찾아왔다.
상고에 다니던 나는 취업과 대학교 진학을 고민했어야 했고, 사실상 큰 고민 없이 진학을 목표로 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좋았던 입시결과에 나는 서울행을 부모님께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다.
당시 돈에 다시 허덕이던 엄마는 취업해서 돈을 벌어 가계에 보탬이 되었으면 했고, 대학을 가야겠으면 취업이 잘된다는 간호대학에 갔으면 했다. 내가 만족하지 못할 선택지들이었다.
반면에 아빠는 그래도 집안에 좋은 대학 나오는 자식이 있어야 하지 않겠냐며 허락하셨다. 중학생 때도 학교 끝나면 전화 와서 빨리 집으로 오라던 아빠로서는 파격적인 허락이었다. 아마 아빠의 허영과 자존심이 내린 결정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며칠간 집에서 말도 안 하고 지내는 나름의 시위이자 투정을 부렸다. 우여곡절 끝에 합격한 대학교 등록금 납부 마지막날에 엄마와 함께 은행에 가서 학자금대출을 받으며 입금을 완료했다.
내 생애 첫 설레는 대출이었다. 나는 지긋지긋한 부모님의 갈등으로부터 벗어날 기회를 처음으로 소심한 반항으로 잡게 되었다.
내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었지만 물론 그 후로도 평탄하지는 않았다.
아! 그렇다고 우리 가족이 유대가 없는 건 아니다. 힘든 시기를 그래도 잘 헤쳐 나와서 그런지 나름 끈끈하다.
나는 아직도 가족들 사이에서 눈치를 보고 항상 알아서 잘하는 둘째 딸이고 지금도 지속되는 부모님의 믿음이 감사하다. 믿음으로 자식을 키운다지 않는가? 그 믿음 주기가 참 어려운데 나는 쉽게 얻었던 것 같다. 감사하다. 그러니 나는 잘 사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그게 나의 보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