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 임산부 배지

여름의 사물들

by 초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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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gnancy badge




학창 시절 내가 가장 좋아했던 색은 분홍색이었다. 분홍색 디키즈 백팩을 메고, 분홍색 나이키 로고가 박힌 하얀 운동화를 신었다. 분홍색 MP3와 분홍색 필통을 챙겨 다녔다. 하이테크C 핑크색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마다 돼지 꼬리를 빼서 필기했다. 베이비핑크 포스트잇은 언제나 필통 속 한 자리를 차지했다. 착한 친구들을 둔 탓에 별소리를 듣진 않았지만, 누군가는 날 보며 쟤 좀 유난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사람은 빨리 변한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나는 그 ‘핑크’의 삶에서 벗어났다. 그간의 나 대신 다른 종류의 나로 살고 싶었다. 예전에 살던 곳으로부터 멀리, 더 멀리 떠나고 싶었다. 내가 가진 물건 중 더는 분홍색을 뿜어내는 것이 없었다. 오히려 어떤 색을 좋아하게 될지 탐험하는 사람처럼, 어울리지도 않는 상하의 색의 조합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입을 줄 알게 되었다. 채도가 높은 보라색 카디건 속에 새파란 원피스를 입을 줄도 알았고, 하얀 꽃무늬가 자글자글한 초록 바탕의 퍼프 블라우스를 살 줄도 알았다. 물론 한참 뒤 그 시절의 나를 보았을 때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고 싶어졌지만.


분홍색과 보라색, 초록색 따위를 건너 지금의 나는 무채색 인간이 되었다. 대체로 어둡거나 새하얀 옷을 고르고, 무늬는 가로 또는 세로의 스트라이프 정도만 선택한다. 밋밋해진 내게 찾아온 낯선 사물은 핫한 핑크색으로 채워진 동그랗고 커다란 임산부 배지. 임신 진단서를 받고 찾아간 보건소에서는 몇 가지 선물과 함께 배지를 챙겨주셨다. 지하철 좌석 건너편 끝, 임산부석에 앉은 사람의 가방에 대롱대롱 매달린 것으로만 보던 사물이 내게도 찾아온 것이다.


민무늬 에코백이나 검정 가죽 가방을 주로 들고 다니는 내게, 임산부 배지는 어쩐지 과한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운 좋게도 키링이 유행인 시절을 살고 있지만) 내가 입고 걸친 모양과, 내 얼굴의 생김을 고려할 때 임산부 배지는 무척 이질적인 물건임이 틀림없었다. 그래서인지 매일 출퇴근하는 통근자도 아닌 데다 배가 지나치게 나오지 않아 임산부로 보이지 않는 시기를 보내는 동안, 임산부 배지를 달고 밖으로 나가는 일은 유난스럽게만 느껴졌다. 앞사람에게 자리를 비키라고 말 대신 물건으로 재촉하는 것 같기도 하고, 온 동네에 ‘여러분! 제 뱃속에는 아기가 있답니다!’라고 자랑하며 걷는 것 같기도 했다. 이상한 불편함 때문에 임산부 배지는 가방에 달리는 대신 책상 위에 가만 누워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게도 배지를 꺼내야 할 때가 마침내 다가왔다. 한 달간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 시간에 이동해야 할 일이 생긴 것. 플랫폼과 출구를 오르내리는 계단을 타다가도 잠시 멈춰 숨을 고르는 시간이 필요한 상태가 되자, 유난이랄지 재촉이랄지 자랑이랄지 하는 단어들은 단숨에 사라졌다. 그저 오늘은 반드시 자리 하나를 사수해야 한다는 절박만 남게 되었다.


수많은 지하철 괴담을 들었다. 모바일 게임에 열중하는 20대 남자, 아주머니와 할머니 사이의 나이로 보이는, 짐이 많은 여성, 다리를 쩍 벌린 할아버지가 임산부 배려석을 차지한 채 절대로 비켜주지 않는다는 말. 아기를 통해 채워진 인류애가 지하철만 타면 모두 사라지게 된다는 조언. 마음을 중무장하고 지하철에 탔다.


한 달간 지하철을 타보니 괴담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체념한 나를 굳이 따라 와 소매를 잡아끌고 빈 자리를 챙겨주던 아주머니, 나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 자리를 양보하던 아빠뻘의 아저씨, 승강장에서부터 주시하고 있다가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 있는 누군가를 쫓아내고(?) 나를 구해준 앳된 얼굴의 여자… 그들은 모두 과도하게 진한 핑크색 임산부 배지를 확인하고 내게 기꺼이 친절을 베풀었다. 내 취향이 아니라고 외면하던 작은 배지는 절절하게 고마운 물건으로 변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가방에 임산부 배지를 넣었다. 지하철을 타고 좋아하는 친구를 만나러 가는 날. 한산한 시간대의 서울 지하철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듬성듬성한 자리와 여유로운 공기가 있었다. 지하철은 마음을 구겨서 자꾸만 조급하고 옹졸하게 만드는 공간. 더는 배지가 필요 없는 날이 오면, 절박한 색을 가방에 매달고 나온 여자들을 위해 평소엔 하지 않을 오지랖도 부려봐야지. 구겨진 마음을 탈탈 털고 활짝 펼쳐서 나눠줘야지.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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