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나와 냉탕

내 가까이 있는 것들

by 쵸코 아빠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순간, 서로의 배려 위에서 살아간다.


어릴 적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아버지를 따라 동네 목욕탕에 갔다. 뜨거운 탕에 몸을 담그면 금세 온몸이 풀어졌고, 아버지는 거친 손으로 내 등을 밀어주었다. 따끔거리는 통증과 함께 묵은 때가 벗겨지던 감각은 이상하게도 개운했다.


성인이 된 뒤에도 나는 여전히 목욕탕을 즐겨 찾는다. 집 욕실에서는 느낄 수 없는 넉넉한 공간, 천장 가까이 맺힌 수증기,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몸을 맡길 수 있는 뜨거운 물 때문이다. 특히 사우나에서 땀을 흠뻑 흘린 뒤, 달아오른 몸으로 냉탕에 들어갈 때의 쾌감은 무엇과도 바꾸기 어렵다. 숨이 멎을 듯 차가운 물이 피부를 감싸는 순간, 한 주 동안 쌓였던 피로와 잡념이 함께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나에게 어느 날, 작은 꾸지람이 찾아왔다. 사우나에서 막 나와 곧장 냉탕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근처에 있던 어르신 한 분이 조용히 말을 건넸다. 땀에 젖은 몸으로 그대로 탕에 들어가는 행동은 다른 사람들에게 위생적으로 불편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큰 소리도, 날 선 표현도 아니었지만 그 말에 나는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무안함과 함께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뒤늦게 따라왔다.


그날 이후로 나는 반드시 샤워를 하고 냉탕에 들어간다. 누가 보고 있어서도, 규칙이 있어서도 아니다. 그저 한 사람의 말이 마음에 오래 남았기 때문이다. 그 습관은 어느새 자연스러워졌고, 나는 그것이 예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행동임을 그제야 실감했다.


얼마 전 다시 찾은 목욕탕에서, 예전의 나와 똑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았다. 사우나에서 막 나온 그는 주저함 없이 냉탕에 몸을 던졌다. 그를 본 순간, 나 역시 당장이라도 냉탕에 들어가 머리끝까지 잠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눈앞에서 흘러내린 땀이 물 위에 번지는 모습을 보는 순간, 그 마음은 금세 식어 버렸다. 괜히 내 몸까지 찝찝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문득 나는 과거의 내 모습을 떠올렸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는 불편한 사람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그를 나무랄 용기는 나지 않았다. 내가 받은 꾸지람은 누군가의 친절이었지만, 그 친절을 다시 건네기에는 망설임이 앞섰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나는 조용히 몸만 식히고 자리를 나왔다.


그날의 경험은 나를 다시 돌아보게 했다. 작은 냉탕 하나를 두고도 이렇게 많은 감정과 생각이 오가는데,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사회는 어떨까.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중요하게 여긴다. 하고 싶은 대로 살 권리, 간섭받지 않을 권리는 분명 소중하다. 그러나 그 자유가 타인에게 어떤 불편이나 피해로 이어지는지는 종종 간과된다.


길거리의 흡연, 보행로를 막아선 무리한 주차, 온라인 공간에서 쏟아내는 거친 말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대부분은 “잠깐인데”, “나 하나쯤이야”라는 생각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그 ‘하나’가 모여 누군가에게는 일상이 되고, 불편이 되고, 때로는 상처가 된다.


공자는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고 말했다. 오래된 문장이지만, 지금 우리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인 ‘인(仁)’과, 그 마음을 행동으로 드러내는 ‘예(禮)’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만 있고 행동이 없으면 공허해지고, 형식만 남은 예절은 쉽게 껍데기가 된다.


목욕탕에서 배운 한마디 꾸지람은 나에게 그 사실을 몸으로 이해하게 했다.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힘은 거창한 제도나 선언에서 나오지 않는다. 사우나 뒤에 샤워를 하고 냉탕에 들어가는 것처럼, 아주 사소한 선택과 습관에서 시작된다. 그 작은 배려가 쌓여 신뢰가 되고, 신뢰가 모여 공동체를 지탱한다.


세상은 단번에 바뀌지 않는다. 오늘 내가 지킨 작은 예절 하나가 내일의 나를 돌아보게 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조용한 기준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이어진 배려들이 모여, 우리는 조금 더 맑고 건강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