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힌 문은 단절을 의미하는 것만 같다

by 재연

문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걸까. 그저 통로의 역할만 하는 물체인 것일까. 그렇다면 연결의 수단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어떤 문의 기본 상태는 열림이 아닌 닫힘이다. 문이 닫혀 있다는 것은 안과 밖이 단절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이때의 문은 연결이 아닌 단절의 수단이라고 하는 게 더 합리적 이어 보인다.


네이버 국어사전에서는 문을 이렇게 정의한다.


'드나들거나 물건을 넣었다 꺼냈다 하기 위하여 틔워 놓은 곳. 또는 그곳에 달아 놓고 여닫게 만든 시설.'


결국에는 벽을 통과하여 사람이 지나가거나 물체를 옮기기 위해 공간을 만들어 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정의 상으로 문의 목적은 연결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다. 이렇게 문은 연결의 장치로 만들어졌지만, 내 경험 속에서는 오히려 단절의 상징처럼 작동했다.


전역을 하고 복학 전에 본가에서 지내는 요즘이다. 본가에는 내 방이 있고, 나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서는 방문을 굳게 닫은 채로 있어야 한다. 군대를 갔다 왔음에도 사춘기 학생처럼 방문을 닫아 가족과 단절된 채 지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개인적인 활동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무언가에 집중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지금 쓰는 글 같은 것 말이다.


가족과 단절된 상태를 만들고 싶지 않지만 문을 닫아야만 할 때는 괜히 마음이 불편하다. 거실에 있는 부모님께 단절의 메시지를 보내는 느낌이다. 실제로는 전혀 그런 게 아니지만 '나는 부모님과 분리되어 있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느낌이랄까. 문을 닫을 때마다 적어도 내 방의 문은 단절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문의 존재 이유를 이분법적으로 생각하자면 하나로 정할 수 없다. 문이 존재하는 공간 자체는 연결을 위해 존재하지만 문이라는 물체는 단절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연결을 위해 문을 만들었지만 단절을 위해 문을 사용한다. 외부의 어느 것이 마음대로 내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말이다. 내가 그 외부의 어느 것이 됐을 때의 무기력함을 잊지 못한다.


늦은 시간 술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화장실이 급했던 적이 있다. 모두가 활동하는 시간에는 활짝 열려 있어 문이 있는 줄도 몰랐던 건물의 경계부를 습관적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그 시간에는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늘 나를 맞이하던 공간이 그때는 나를 거부했다. 그 순간 그 문이 그렇게 커 보일 수 없었다. 잔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문은 선택적 허용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자신이 원할 때만 출입을 허용한다. 우리가 건물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건물이 우리를 허용해주고 있던 것이다.


문은 외부와 내부를 구분 짓기 위한 존재이다. 연결은 그 공간이 행한다. 나는 그 단절을 위한 물체를 통해 문득 가족과의 정서적 단절을 느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던 일이지만 유독 문의 존재가 잔인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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