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개요>
1392년(공양왕 4) 음력 4월,
개경 정국은 마지막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권신(拳臣) 이성계가 낙마 사고로 병상에 눕자,
공양왕이 잇달아 문병 사자를 보낼 만큼
조정의 시선은 그의 거처로 쏠렸다.
바로 이 무렵 정몽주는 대간을 움직여
“정도전, 조준 등 이성계 측근을 제거한 뒤
이성계를 도모”하려는 상소 공세를 시도했다.
하지만 이러한 정몽주 일파의 움직임은
칼날위의 춤처럼 위태로웠다.
이미 고려의 군권을 모두 장악한 이성계 세력은
이러한 구 고려파의 마지막 공세에 점점 인내심을 잃어갔다.
특히 정보를 최일선에서 다루던 이방원이
제일 먼저 결행의 밑그림을 그렸다.
사건 당일의 뼈대는 간명하다.
날짜는 음력 4월 4일.
정몽주는 그날 이성계를 찾아 병세를 살피고 길을 돌렸다.
이어 상가(전 판개성부사 유원) 조문으로
동선이 잠시 지체됐고,
그 사이 이방원의 심복들이 무기를 갖추고 기다렸다.
정몽주가 잠복한 장소로 들어서자
조영규 등이 달려가 길을 막고 철퇴를 휘둘렀다.
하지만 정몽주는 치명상을 피했고
말을 채찍질해 급히 달아나려 했다.
그러자 조영규가 말머리를 내리쳐 말을 넘어뜨렸다.
낙마한 정몽주가 급히 뛰어서라도 달아나려 했지만
조영규 등이 추격해 결국 그를 철퇴로 살해했다.
<실록>이 기록하는 그날의 간략한 전말이다.
장소에 대해 대중은 “선죽교”를 기억하지만,
초기 1차 기록은 다리 이름을 특정하지 않는다.
조선 전기 문헌과 후대 전승을 종합하면
‘개경 시내, 정몽주 집 근처’라는 진술도 병존한다.
오늘날 현장의 상징은 선죽교로 굳어졌으나,
학계·언론의 팩트체크에서는
“선죽교 명시는 후대 형성”이라는 점이
반복적으로 확인된다.
‘선죽교 혈흔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이야기는
정식 사료가 아니라 후대 전승의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사건의 동기와 사후처리는 정치의 언어로 남았다.
《실록》은
이방원이 “정몽주 등이 장차 우리 집을 모함하려 하니
어찌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겠는가”라고
진술한 것으로 전한다.
태조(이성계)는 “우리 집안은 본래 충효로 알려졌는데
너희가 마음대로 대신을 죽였으니…”라며 불호를 드러냈다.
즉, 아들은 ‘선제 제거’, 아버지는 ‘외피의 훼손’이라는
서로 다른 계산을 같은 밤에 꺼내 들었다.
사건 직후에도 공(功) 과시는 절제되고,
정몽주에 대한 공식적 예우는 유지되었는데,
이는 훗날 정몽주를 문묘에 종사하고
‘문충’으로 시호를 세워
국가 윤리의 상징으로 편입하는 장기 처리로 이어진다.
‘피의 사실’을 ‘제도의 기념’으로 봉합하는
조선식 정치 운영의 전형이었다.
이방원의 결행에 대한 이성계의 본심과는 별개로
정몽주 암살 후 이성계 세력의 정치적 속도전은
곧바로 이어졌다.
고려의 마지막 지렛대가 뽑히자,
체제의 저항은 한순간 살얼음처럼 깨졌고,
새 국호의 인준이라는 마지막 절차만 남긴 채
이성계 정권은 이미 ‘운영’에 들어갔다.
정몽주가 쓰러지던 그 날,
역사는 새로운 장으로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