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노트 2-1. 정몽주의 반격

정몽주의 마지막 반격은 성공 가능성이 있었을까?

by HistoryFile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와 정도전을 위시한 개혁파가

고려의 모든 군권과 요직을 차지하며,

권력의 축이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었다.

이제 고려는 그 마지막을 향해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승부가 끝나가던 그때,

이성계가 해주(황해도) 벽란도 인근에서

사냥을 하다 낙마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이성계는 중상을 입었고,

현지의 요양처에 누워 개경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바로 그 시점,

정몽주와 구(舊)고려파는 일말의 희망을 보았다.

궁궐 뜰에는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라는

낮은 속삭임이 돌았다.


정몽주는 조정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준비를 끝냈다.

고려의 마지막 충신,

정몽주의 마지막 반격이 시작된 것이었다.


정몽주의 첫 수는 ‘법의 칼’ 이었다.

이성계가 병상에 누운 직후,

그는 개혁파 핵심을 ‘역모·전횡’에 준하는 사유로

처단·추방하려는 조처에 속도를 붙였다.


실제로 4월 초,

남은·조준 등이 축출(유배)되었고,

정도전은 유배지에서 구금된 뒤 처형 상신까지 올랐다.

이때 수도 내 개혁파 인사 수십 인이

군직 정지·가택 연금 등 강제 조치를 당했다.


병상에 누운 이성계가

“정도전을 석방하라”는 요구를 내보냈으나,

한동안 묵살될 정도로 정몽주의 정치력이

주도권을 잡았다.


둘째 수는 ‘공양왕의 위신’을 전면에 내세워

조정 문무요직과 금군(禁軍) 라인을 갈아 끼우는

인사 공세였다.


정몽주는 영의정부사(정승)로서 교지·계문을 통해

“왕명으로” 추진되는 인사·사법 조치를 묶었고,

도성 수문권과 금군 장교단을 우선 장악하려 했다.


여기에 더해, 이성계의 낙마로 전열이 흩어진

이가(李家) 군사 조직의 일시적 공백을 파고들어,

‘왕명—문서—금군’의 3중 고리로

그들을 통제하려는 시도가 병행되었다.


그러나 결정적 변수가 생겼다.

이성계의 부상 소식을 들은 이방원이

해주 연해의 병상으로 급히 달려가,

부친을 여인 가마에 숨겨

개경 자택으로 ‘밀반환’시키는 데 성공했다.


‘장군이 아직 살아 있고, 수도에 있다’는 소식이 번개처럼 퍼지자,

정몽주 진영의 처형·숙청 시계가 멈칫했고,

공양왕도 즉각 문안물(問安物)을 보낼 만큼 기류가 돌아섰다.

연쇄 반전이었다.


이 성급한 균열이 정몽주의 다음 수를 조급하게 만들었고,

그는 직접 병문안을 가장해

이성계의 병세와 정치적 태도를 최종 확인하려 했다.


이 대목에서 이방원과 정몽주의

‘하여가—단심가’로 알려진 시문 교유가 전해지지만,

해당 시 교환의 서사는 떠도는 구전이

후대에 전승되어 기록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중요한 것은,

그날 밤 정국의 ‘속도’를 누가 다시 잡았는가였다.

이방원은 결행을 택했다.

정몽주의 귀갓길에 잠복해 있던

이방원의 무사들은(조영규·조영무·고여여·이부이)

쇠추(철퇴)·곤봉으로 일격을 가해 포은 정몽주를 쓰러뜨렸다.


살해 이후 “허탄한 말로 정국을 어지럽혔다”는 취지의 방(榜)이 내걸렸고,

정몽주 가문은 연좌로 몰락했다.

이 극단적 조치는 이성계 본인에게도 여러모로 씁쓸한 결과였으나,

현실정치의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그 밤 이후,

고려 온건파의 결속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고,

개혁파의 복권·재결집이 가속화 됐다.


정몽주의 퇴장과 함께

고려의 멸망을 막을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도 함께 사라졌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정몽주는 자신의 반격이 정말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본인도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

대의를 위한 희생을 선택한 것일까?


이성계의 낙마사고 시점으로 돌아가

장부를 끝까지 넘겨보면, 정몽주와 구(舊)고려파가

처음부터 매우 불리한 싸움을 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주요 군권은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 세력의 손에 사실상 고정돼 있었고,

수도 개경의 핵심 병력과 지휘 라인 또한

의흥친군위(이성계의 친위군)와 사병 조직을 통해

이미 이가(李家)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이성계의 부재를 이용해

왕명으로 인사를 흔들어 장악하려 했던

금군(禁軍,왕의 친위군)조차

이성계 측 지휘선에 묶여 있던 실정이었다.


정몽주는 문민의 정통성과 법리를 동원해

‘왕조의 얼굴’을 지키려 했지만,

‘칼과 말’을 움직일 수 없는 정치인은

새 왕조의 예행연습을 마친 군사조직 앞에서 너무 가벼웠다.


결정타는 경제와 관료의 이해가 어느 편에 있었느냐였다.

과전법의 틀이 마련되면서

토지 재분배의 수혜를 기대하던 신흥 사류와 중견 관료들은

이미 개혁파와 자신들의 운명을 묶었다.


정몽주가 내세운 충절의 기치는 숭앙을 받았지만,

‘내일의 녹’이 걸린 관료군의 발을 돌려세우기엔

힘이 부족했다.


여기에 최영이 제거된 뒤 지방의 유력 무장망도

사실상 이성계와 정도전·이방원 라인으로 재편돼 있었다.

개경에서 깃발을 든다 해도,

지방에서 올라올 구원병이 없고,

수도 성문을 여닫는 장부를 쥔 인물들이 딴생각을 하지 않는 이상

반격은 몇 번의 회의, 몇 장의 교지, 몇 줄의 인사(人事)로는

현실화되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완전히 찻잔 속 태풍이었느냐 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그가 일으킨 태풍의 순간풍속은 실재했다.


군주가 아직 공양왕인 이상,

법통과 의례를 앞세운 정몽주의 말과 글은

왕명을 등에 업을 수 있었고,

이성계가 몸을 가누지 못하던 며칠 동안

‘합법의 칼’은 잠시 그의 손에 들릴 수 있었다.


만약 그가 결단을 문사(文士)의 방식이 아니라

군사(軍士)의 속도로 내렸다면,

이를테면 이성계 일가의 거취를 즉각 묶고,

개경의 문무요직을 하룻밤 사이에 바꾸고,

도성 수문장과 금군 장교를 선제 포섭했다면

역사의 문장이 달라질 가능성은 작지만 분명 있었다.


그러나 정몽주는 끝내 그 선을 넘지 않았다.

그는 명분을 잃는 피의 한 줄을 경계했고,

상대는 바로 그 한 줄을 현실정치의 칼로 먼저 그었다.


도성의 정보망을 장악한 이방원은 정국의 숨을 먼저 읽었고,

속도를 끌어올려 한 번의 결행으로 역사의 방향을 꺾었다.


그 밤 이후, 반격의 계산은 원천부터 달라졌다.

명분은 남았으나, 명분을 지킬 손이 사라졌다.


역사서는 이를 도덕의 비극이라 적지만,

정국의 계산은 냉혹했다.


반격의 바람 소리는 컸으나,

바람은 성문을 움직일 만큼의 질량을 끝내 모으지 못한 채

찻잔 속 태풍이 되고 말았다.


결국 정몽주의 마지막 반격은

가능성에서 사건으로 넘어가지 못했다.


월, 목 연재
이전 06화사건 2. 정몽주 암살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