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노트 2-3. 이성계의 거리두기

이성계가 정몽주를 제거한 이방원을 배척한 이유

by HistoryFile


정몽주 암살사건이 벌어졌던 1392년(공양왕 4년) 늦봄,

가장 먼저 계산을 바꿔야 했던 사람은

이방원이 아니라 이성계였다.


위화도 회군(1388) 이후

왕위 교체와 제도 개혁의 레일 위에 올라탄 이성계 세력은,

두 가지를 동시에 바라봤다.


하나는 새 왕조의 ‘명분’

—유교 정치의 표준을 따르는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개혁의 궤도—이고,

다른 하나는 그 명분을 믿고 따를 신흥 관료층의 민심이었다.


그런데 개혁 반대파의 기둥이자

선비정치의 상징인 정몽주가

도성 한복판에서 참혹하게 주살되자,

두 축이 동시에 흔들렸다.


새 왕조가 약속하는 ‘명분의 정치’가

잔혹한 폭력과 함께 출발했다는 도덕적 부담,

개혁의 실무를 떠맡을 신흥 문신층의 냉랭한 시선이

이성계의 발걸음을 무겁게 잡아끌었다.


그래서 태조가 될 사내는

공개적으로 아들 이방원과 거리를 두는 제스처를 취했다.

“폭력으로 권력을 열었다”는 인상을 지우지 못하면,

곧바로 뒤따를 개혁 입법과 명과의 외교 교섭, 관료 재편이

모래 위 성처럼 위태로워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이성계의 거리 두기는 즉흥적 감정이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설계였다.


1391년 토지개혁안(과전법)의 시행과 보완,

중앙 기구 개편, 수도 이전 논의 같은 굵직한 개조 과업은

칼끝보다 문서와 절차, 회의와 명령으로 굴러가야 했다.


이성계의 청사진은 ‘공양왕의 권위’를 잠정적으로 활용해

제도와 인사를 단계적으로 바꾸고,

정도전·남은 등 개혁파 문신·무신에게

설계권을 실질 위임한 뒤,

왕위 교체를 “이미 작동하는 새 질서의 마무리”로

보이게 만드는 방식이었다.


이 맥락에서 ‘야간의 암살’은

새 체제의 윤리적 표면에 길고 깊은 상처를 냈다.

무엇보다 대외 변수—명나라의 책봉—가 남아 있었다.


명이 조선 국호 승인과 군왕 책봉을 결정하는 자리에서

“무력 찬탈”의 오명이 짙어지면,

외교 출발선 자체가 낮아질 수 있었다.


그러니 이성계는 이방원에게

냉담한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는 국내 관료사회와 북경의 귀를 동시에 겨냥한 포석이었다.


이성계가 이방원을 배척한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그린 권력의 설계도 때문이었다.

이성계는 건국 직후부터 ‘왕자들의 칼’보다

‘문신의 펜’을 앞세우는 길을 골랐다.


사병 혁파, 중앙군 재편, 과전법 추진, 도성 이전 같은 난공사들은

하루아침에 끝날 일이 아니었다.

여기서 군사적 결행으로 존재감을 키운 왕자가

공훈을 방패 삼아 관료군을 압도하기 시작하면,

새 정권은 시작부터 내부 분란에 휩싸일 수 있었다.


이성계가 이방원을 배척(혹은 냉대)하는 태도를 보인 것은

개혁의 중심축을 정도전 라인에 실어주고,

왕자들의 전횡을 제동 하려는 일종의 ‘장치’였다.

‘왕권—재상정치—관료군’의 삼각구도를 안정시키려는

그의 권력 설계도에서

‘정적 암살’로 존재감을 폭발시킨 호전적인 왕자는

상당히 위험한 변수가 될 수 있었다.


공식화된 후계 구도는 그 거리 두기를 제도화하는 장치였다.

1392년 건국 직후 어린 방석을 세자로 세운 결정은

신덕왕후의 의중과 내정 연합의 계산이 교차한 결과였다.


동시에 그것은 분명한 신호였다.

“공로가 아니라 설계가 후계를 정한다.”

왕세자 책봉의 논리가 ‘전장 공훈’이 아니라

‘정치적 균형’과 ‘새 체제의 안정’에 있을 때,

이방원의 정치적 상승 곡선은 자연히 눌렸다.


그는 여전히 영향력 있는 왕자였지만,

‘체제의 얼굴’이 될 문·무 신료군과

같은 위치에 설 수는 없었다.


물론 사적인 장면의 대사는 달랐을 수 있다.

위태로운 낙마 정국의 현장에서

이성계가 이방원의 결단을

‘불가피한 현실’로 받아들였을 가능성도 크다.


하지만 공개 기록과 인사 신호는 일관됐다.

공신 책록과 관직 배분에서 이방원은 전면에 나서지 못했고,

정도전·남은 등 문신 개혁파가 실질적 설계권을 쥐었다.


훗날 ‘함흥차사’로 상징되는

냉랭한 부자관계 일화가 민간에 퍼진 것도,

최소한 대중이 읽어낸 정치적 거리감이 분명했음을 보여준다.


요컨대 이성계의 배척은

정몽주 개인에 대한 애도의 표현이 아니라,

새 왕조가 지켜야 할 외피—명분·질서·법통—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택한 길은 “피로 연 문은 피로 닫힌다”는 악순환을 피하려는,

철저히 목적 지향적 계산이었다.


그러나 칼을 들고도 공을 나누지 못한 채 배척당했던

왕자의 정치적 분노는 계속 응결되고 축적되어 갔다.

결국 억눌렀던 균열은

1398년 1차 왕자의 난으로 터져 나왔다.


이성계가 택한 ‘배척’은

체제를 지키기 위한 계산으로 일시적 성공을 거뒀지만,

장기적으로는 억눌린 권력 에너지가

더 강한 파열로 터져 나와

다시 정국을 피로 물들이는 사태를 맞이하고 말았다.


이는 정몽주 암살사건 이후

이성계가 치러야 했던 가장 큰 정치적 비용이었다.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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