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마지막 충신 정몽주는 조선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나?
조선 개창 세력의 칼끝에 쓰러진 사람을,
조선은 곧 ‘교과서’에 올렸다.
정몽주는 왕조가 바뀐 다음에도
“고려의 마지막 충신”이라는 표제를 달고 재평가됐고,
국가는 그를 처형한 사실을 숨기지 않는 대신
‘정당한 충(忠)을 끝까지 지킨 선비’의 표본으로 삼았다.
건국 초부터 조선은 정몽주를 폄하하지 않았다.
반대로 시호를 주어 문충공(文忠公)이라 칭하게 하고,
관직도 사후로 더해 체면을 세워 주었다.
새 왕조가 내세운 메시지는 간단했다.
“우리는 충절의 가치를 계승한다.
다만 방향이 바뀌었을 뿐.”
궁정 의례와 국가시험의 설계에서도 이 기조는 반복됐다.
포은의 시문과 행실은 과거(科擧)의 논거로 인용됐고,
지방 유림의 정몽주 제향은
관에서 장부와 비용을 보태는 ‘공적 의례’가 되었다.
조정은 그를 민심의 거울로 세웠고,
그 거울 앞에서 새 왕조의 윤리 교본을 세웠다.
시간이 흐를수록 격은 더 높아졌다.
도학의 정전(正殿)인 문묘에 종사되어
공자와 동방의 현현들 사이에 이름을 올렸고,
영천과 개경 일대에는 서원이 잇달아 세워졌다.
선죽교의 대나무는 전설을 품었고,
포은서원·영모재 같은 사당은 예산과 관리를 배정받았다.
국왕들은 국사 교정과 예악 정비의 분기점마다
정몽주를 호출했다.
“왕조가 달라져도 신하의 윤리는 같다”
태학·향교의 강론에서 이 문장은 거의 상투어였다.
때로는 정치의 바람막이로도 쓰였다.
당쟁이 거세질 때마다
임금은 포은의 제사를 치르고 절의를 호명했다.
충을 소환해 붕당을 다스리는, 조선식 통치 언어의 표본이었다.
그를 베었던 장본인은 어떠했을까?
태종은 즉위 뒤 정몽주의 명예를 공식적으로 거듭 세웠고,
제향과 비문의 격을 높이는 데 이견을 두지 않았다.
살인의 공을 정치적 자산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부친의 노선을 이방원이 그대로 이어받았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다.
뒤로 갈수록 국왕들의 애호는 더 노골적이다.
영조·정조 대에 이르면
포은은 ‘문(文)’과 ‘절(節)’을 겸비한 인물상의 상징으로,
법전과 학교, 의례의 각주마다 모습을 드러낸다.
결과적으로 정몽주는
‘적을 칼로 무너뜨린 정권이 그 적을 윤리의 깃발로 삼은’
매우 드문 역사적 사례가 되었고,
그 깃발은 조선의 500년을 관통했다.
그렇다면 그의 후손의 처지는 어땠나.
새 왕조는 정몽주의 집안을 응징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향과 분묘를 관리할 권리,
제사에 필요한 토지(사패·사당전),
종손에게 돌아가는 제수(祭需)와 역(役) 면제 등
‘충신가의 예우’를 제도화했다.
문중은 서원을 통해 지방 유림과 연결되었고,
종친·문중 대표는 국가 의례에 초청되며
가문의 명예가 공적 자산으로 전환되었다.
후손들이 과거에 응시하고 관직에 오르는 데
제도적 장벽은 없었고,
포은의 가계라는 간판은 관료 사회에서
신뢰의 참조점으로 기능했다.
국란기에는 가문의 이름이 다시 소환되기도 했다.
임진왜란 이후 충절을 재정비하던 무렵,
조정은 충신가의 제향과 사우를 복구하며
지방의 질서를 다잡았다.
정몽주는 그렇게 ‘패자의 충’에서 ‘승자의 윤리’로 건너갔고,
그의 집안은 처벌의 대상이 아니라
의례의 파트너가 되었다.
선죽교에 얽힌 설화가
시간이 갈수록 더 또렷해진 까닭은 여기에 있다.
조선은 제도로 패자의 이름을 지켰고,
후손은 그 이름으로 다시 국가를 지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