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족 해체 시작

- 한, 유기된 자의 분투기

by 세니사

학교에 가지 않는 언니

그날은 5월 5일이었다. 태어나 여덟 번째 맞는 어린이날.

우리 네 남매는 낯 모르는 아주머니와 함께 서울 어느 터미널에서 고속버스를 탔다. 우리를 터미널까지 데리고 온 아버지도, 함께 고속버스를 탄 언니도, 엄마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엄마는 어디 갔을까. 궁금했지만 묻지 못했다. 난 그런 애였다. 가족에게조차 무얼 묻거나, 요구하거나, 속내를 말하거나, 그러지 못하는 아이. 과하게 내성적이고 순종적인 아이.

달리던 고속버스가 잠시 멈춘 휴게소에서 우리는 삶은 계란인지 핫도그인지를 먹었다. 다시 달리는 버스 안에서 우리 중 누군가가 심하게 게워 냈다. 심한 멀미에 시달리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그들을 처음 만났다.

작은 아버지, 작은 어머니, 사촌 여동생, 사촌 남동생.

네 가족이 살기 딱 알맞아 보이는 크기의 아파트, 그곳에 더부살이로 지낼 애들 넷이 비집고 들어갔다. 쭈뼛쭈뼛, 어색하게, 불안하게.

우리 네 남매는 약 1년을 울산 작은 아버지 댁에서 살았다.

그 해에 언니는 중학교 1학년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그곳에서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언니는 학교에 가지 못했다. 종일 집을 청소하고 식사 준비를 돕고 식구들의 옷가지를 비벼 빨고 우리를 챙겼다.

아버지가 언니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작은집 살림을 거들게 한 이유는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넷이나 되는 어린 자식들을 맡겨 두기 위한 전략이거나 면피. 혹은 모든 자식을 초졸로 끝내려는 계획의 시작.

짐작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 아버지의 의중이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우리가 아는 사실은, 평생을 이어갈 언니의 육체노동이 그렇게 시작되었다는 것뿐이다.


서늘한 작은 어머니와 따뜻한 교회

우리가 그곳에 머무는 동안 아버지는 작은 아버지에게 얼마간의 생활비를 보냈다. 그러나 돈 몇 푼에 시댁 애들 거두는 일을 반길 기혼 여성이 어디 있겠는가. 애초부터 작은 어머니는 아버지를 싫어했고, 그 아버지가 낳은 자식들을 싫어했다. 그 자식들이 주는 불편도 싫어했고, 그 자식들이 주게 될지도 모를 불편도 싫어했다.

단란한 가정의 침입자, 그게 우리였다.

작은 어머니가 안방문을 닫고 그 안에서 자신의 두 아이에게만 간식을 먹일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처지를 번번이 새롭게 새겨 넣었다. 간식을 달리 먹이거나 안 먹이는 일이 대수로운 차별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행위가 사랑이나 미움의 발로라는 사실을 막연히 알았다.

나는 사랑받는 사촌 동생들이 부러울 뿐이었다. 하지만 언니는 부러워하면서 초라해지고, 초라해지면서 어른들의 눈치를 살피는 동생들을 보는 일이 속상했던 모양이다.

어느 날 언니가 작은 어머니 몰래 백도 한 개를 우리에게 급히 나누어 먹였다.

“이거 한 상자 선물로 들어왔어. 작은 엄마 오기 전에 얼른 한 개만 나눠 먹어.”

오빠가 먼저 한입 먹고 내 차례가 돌아왔다. 노르스름하면서 살짝 분홍빛이 도는, 예쁜 백도를 한입 베어 입에 넣었다. 바로 그때 언니 손에 들린 복숭아 과육에 박힌 커다란 벌레의 잘린 몸통이 보였다. 놀란 나는 입안에 있던 복숭아를 뱉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작은 어머니를 속이려 해서, 하느님께 벌을 받았구나.

어쩌면, 작은 어머니는 좋은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일요일마다 헌금을 쥐어 우리를 교회에 보냈다. 난 교회에 가는 일이 즐거웠다. 교회에서 만나는 주일 학교 선생님들은 모두 친절하고 다정했다. 함께 기도문을 외우고 찬송을 부르는 일도 내게는 진지한 놀이였다.

그해에 교회에서 열린 크리스마스 행사에서 나는 흰 티에 남색 바지를 입고 행사를 여는 인사말을 해야 했다. 짧은 말이었지만 실수를 할까 봐 외우고 또 외웠다. 행사 당일, 예배당에 모인 많은 사람들 앞에 서서 과하게 내성적이었던 나는 얼마나 긴장했던가.

다행히 실수하지 않고 인사말을 마쳤을 때, 선생님들이 나를 보고 환하게 웃던 모습을 난 아직도 기억한다. 난생처음으로 무언가를 해냈다는 뿌듯함도.


책임

이듬해 그 집을 떠날 때 작은집 가족들과 나누었던 인사는 기억에 없다. 막연히, 다시 볼 일이 없으리라 느꼈던 마음은 기억한다. 다시 연락하면 결코 환대받지 못하리라는 느낌도.

아주 나중에 나로서는 피치 못할 지경에 처해 이 불문율을 어겼다. 그때 작은 어머니에게 들었던 말을 어쩌면 1년 여의 더부살이를 마치고 그 집을 떠날 때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잘 살아도 연락할 거 없다. 너희끼리 잘 살아라.”

우리가 어떤 상황에 놓여도 세상에는 우리뿐이라는 사실을 마음 깊이 새겨 넣어 준 말.

말은 허공에서 스러지는 소리이지만 때로 심장에 박혀 빠지지 않는 못이 되기도 한다. 작은 어머니를 통해 내가 세상에서 처음 맞닥뜨린 냉대의 책임이 작은 어머니에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제 가족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리라. 그 냉대의 궁극적 책임은 장차 있을 진짜 유기의 준비 운동을 한 셈인 아버지, 그에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