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 두 번째 시그널 : 버려지면 커지는 책임

- 한, 유기된 자의 분투기

by 세니사

《프레셔스》는 여러 실화들을 바탕으로 한 소설이자 영화이다.

주인공 프레셔스의 아비는 프레셔스가 세 살일 때, 처음 그녀를 성폭행했다.

영화는 열여섯 살의 프레셔스가 둘째를 임신했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정학당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딸을 거듭 임신시킨 프레셔스의 아비는 이미 어디론가 떠나고 없다.

어미는 먹고 자고 텔레비전 보고 딸을 욕하고 때리는 일로 하루를 보낸다.

생활비는 정부 보조금으로 해결하고 집안일은 학교에서 돌아온 프레셔스에게 시킨다.

어미는 딸을 증오한다.

딸이 제 남편을 유혹해 남편이 자신에게 주어야 할 사랑을 빼앗아 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하는 딸을 내쫓지도, 떠나지도 않는다.

오히려, 집 나간 딸이 돌아오기를 바란다.

보조금을 받으려면 딸이 필요하고, 자신을 돌보아 주고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줄 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기중심적인 어미는 세 살 딸이 친부에게 성폭행을 당할 때도, 친부의 지속적 성폭행으로 딸이 임신을 반복할 때도 미성년 자식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성인이라면 제 자식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의식이 그녀에게는 없었기 때문이다.




만 1년 남짓 울산 작은 아버지 댁에서의 더부살이 생활을 끝내고, 우리 네 형제가 도착한 곳은 인천 도화동의 한 단독주택이었다.

제법 넓은 그 집에는 낯 모르는 젊은 여인이 먼저 와 있었다.

아버지는 젊은 여인을 엄마라고 부르라고 했다.

여인이나 아버지에게 순하고 어린 동생과 나는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언니와 오빠였다.

그 여인이 아버지가 어머니를 몰아내기 위해 계략을 꾸민 동인이었다는 사실을 언니는 알고 있었다.

오빠는 천성적으로 고집이 셌을 뿐 아니라 이른 사춘기에 들어서 있었다.


여인은 언니와 오빠에 대해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지어댔다.

아버지가 바다에서 돌아와 집에 있는 동안 언니와 오빠, 특히 언니는 맞고 또 맞았다.

그러나 당시 나는 언니가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는 사실, 아버지에게 심하게 맞는다는 사실, 어느 날 사라졌다는 사실만을 알았다.

훗날 알게 된, 당시 언니에게 벌어진 일은 대략 이랬다.



아버지는 열다섯 살 언니를 학교에 보내는 대신 동인천 어느 의상실에 취직시켰다.

언니가 받은 월급은 여인이나 아버지가 모두 가져갔다. 두 사람은 언니에게 차비조차 주지 않았다.

언니는 아주 이른 시간에 일어나 동인천까지 걸어갔고, 한밤중에 도화동까지 걸어왔다.


눈 내린 어느 겨울, 언니는 미끄럽고 추운 길을 걸어오느라 자정이 넘어 집에 도착했다.

그런 언니를 두고 여인은 아버지에게 또 거짓말을 했다.

남자가 생겨 저 모양이라고.

아버지는 언니를 매질하다 못해 부엌칼을 들고 위협했다. 겁에 질린 언니는 대문 밖으로 달아났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언니는 열여섯 살이었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삶은 집의 품속에 포근하게 숨겨지고 보호되어 시작된다고 했다.

집은 우리를 평화롭게 꿈꾸게 하고 우리의 몽상을 지켜주는 곳이라고도 했다.(『공간의 시학』, 동문선, 2003, 80~81쪽).

그러나 언니에게 집은 그런 곳이 아니었다.

군인이었고 뱃사람이었던 아버지는 맏딸인 언니를 아주 어릴 때부터 모질게 때렸다.

젊은 여인과 살면서는 더 가혹하게 매질했다.

공포에 질린 언니가 끝내 집에서 도망쳐 나갈 때까지.

그러나 집 바깥에 피난처가 있을 리 없었다.


영화의 주인공 프레셔스가 엄마의 폭력을 피해 갓 낳은 둘째를 데리고 집을 나왔을 때, 프레셔스에게는 도움을 줄 사람이 있었다.

정규 학교에서 정학당한 후 다니게 된 대안학교의 교사 블루 레인, 그녀는 집 나온 프레셔스가 지낼 쉼터를 구해 주었다.

공부를 계속하고 글을 쓰고 자신을 사랑하도록 프레셔스를 격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1970년대 우리나라에는 가정 밖 청소년을 위한 어떤 쉼터도, 그들의 학업을 지원하는 어떤 기관도, 그들이 내면의 고통을 승화시키도록 돕는 어떤 사람도 없었다.

지금은 어떨까.

국회입법처는 정확한 추산이 불가하지만, 2023년 한 해 동안 약 13만 명의 아동·청소년이 실종 신고되거나 가출을 경험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같은 해 청소년쉼터 입소 인원은 5,827명으로, 실종 신고되었거나 가정 밖 청소년으로 파악된 이들의 5.5%에 불과했다.

2020년대 대한민국은 가정 밖으로 내몰린 아이들의 대략적 수는 파악하고 있지만 그 가운데 극소수의 아이들만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

1970년대와 비교하면, 그래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청소년쉼터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절, 한겨울 거리로 내몰렸던 언니는 이른 나이에 엄마가 되었다.

언니는 아이를 위해 긴 세월 동안 적게는 하루 열두 시간, 많게는 하루 열일곱 시간을 일했다.

언니의 혹독한 노동과 피눈물로 키워진 아이는 대학 졸업 전에 취업하며 소프트웨어 개발자가 되어 성실하게 살고 있다.

수십 년 동안 육체노동으로 자식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가르친 언니는 65세인 올해도 노후를 위해 일을 하고 있다.

아버지의 난폭한 매질과 긴 세월의 육체노동으로 망가진 몸 구석구석을 수술로 고쳤거나, 고치지 못해 진통제를 먹으면서, 벽을 짚고야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는 다리로 오늘도 노동을 계속한다.



미성년 자녀를 보호, 양육, 교육해야 한다는 책임 의식이 영원히 살려는 이기적 유전자 때문인지, 교육된 도덕심 때문인지, 타고난 측은지심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영화 속 프레셔스의 부모에게도, 현실 속 우리 형제들의 친부모와 새어머니에게도 미성년 자녀에 대한 책임 의식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부모들이 등 돌린 책임은 결코 소멸되지 않는다.

그들이 외면한 책임은 무게가 한껏 늘어난 채 자식에게, 자식의 자식에게 넘겨지게 마련이다.

더욱이, 대기업 정규직이 아닌 이상 나날이 몸이 망가지는 육체노동의 대가가 불규칙하고 적은 우리 사회의 구조는 학력 자본이 없는 자가 견뎌야 하는 책임의 길이까지 늘려준다.


이 모든 현실을 알지 못했던 그 시절, 미성년 맏딸에 대한 일체의 책임을 저버린 아버지의 행동이 모든 자식을 내칠 수 있는 두 번째 시그널이라는 사실 또한 알지 못했다.

그러나 머잖아 세 번째 시그널이 울렸을 때는 초등학교 4학년에 불과했던 나조차 불길한 기운을 감지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1. 첫 번째 시그널 : 가족 해체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