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유기된 자의 분투기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선과 행복은 동의어였다.
그는 인간의 모든 행위와 선택이 선(善), 곧 행복을 지향한다고 했다.
그에게 행복이란 이성을 탁월하게 발휘하여 과도함과 부족함의 중간, 일명 중용에 머무는 상태이다.(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1권 제1장).
무한한 부를 추구하는 오늘 우리 사회에서는 설득력 없는 행복론이다.
프로이트 또한 인간이 삶에서 성취하고자 하는 바는 행복이라고 보았다.
프로이트에게 행복은 ‘강렬한 쾌락(즐거움)의 체험 상태’와 동의어이다.
‘강렬한 쾌락’을 추구하는 근원적 힘은 ‘리비도’이다.(지그문트 프로이트, 「쾌락 원칙을 넘어서」, 『프로이트 전집 3』, 세창출판사)
리비도는 ‘성욕’ 혹은 ‘생명 충동’이다.
리비도에 의해 촉발되는 행복이 즐거움이라면, 현대인에게 꽤 설득력이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조차 행복은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로 정의되어 있으니 말이다.
프로이트 이론이 다만 이론은 아닌지 고대의 이야기에서 특히, ‘성적으로 강렬한 쾌락’은 중요한 모티프가 되기도 한다.
오디세우스는 고대 그리스 연합군의 장군이자 이타카의 왕이다.
오디세우스의 지략으로 트로이를 멸망시킨 그리스 연합군은 모두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만은 10년 동안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사실, 그 10년 가운데 8년을 그는 아름답고 매력적이며 요사스러운(?) 두 여성-키르케, 칼립소-과 차례로 함께 있었다.
그가 그녀들을 떠나지 못한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그녀들이 오디세우스를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품을 찬찬히 읽어보면, 그는 떠나지 못했다기보다 떠나지 않은 듯하다.
그가 아름다운 여성과 즐거움을 누리는 동안 그의 가정은 위기에 처한다.
이타카의 귀족 청년들이 오디세우스 집에 눌러앉아 그의 재산을 탕진한 것이다.
욕망이 초래한 재난이 이보다 심각한, 또 다른 영웅 이야기도 있다.
노르웨이 왕자 하랄드는 역사에 바탕을 두고 제작된 드라마 《바이킹스 : 발할라》의 영웅들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왕인 형에게 차기 왕위를 약속받았다.
하지만 형은 사실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이다.
결국 형의 배신으로 모든 것을 잃은 하랄드는 왕위에 오르기 위해 군대가 필요하고, 군대를 모으려면 돈이 필요하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비잔틴 제국 황제의 근위대장이 된다.
그리고 수년 동안 혁혁한 공을 세워 충분한 재물을 모은다.
그런데 돌아갈 수 있는 때에 이르러 그는 황제 아내의 유혹을 받고 그녀와 불륜에 빠진다.
그 쾌락이 너무 달콤해 하랄드는 노르웨이의 왕이 되겠다는 일생의 목표를 차일피일 미룬다.
그러다 그 쾌락으로 인해 지지자, 연인, 지위, 명예, 친구를 모두 잃고 자신의 목숨마저 위태로워진다.
무분별한 성욕을 경계하라는 가르침이 담긴, 다만 ‘이야기’ 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벌어지지 않을 일이라면 경계하라는 가르침도 필요 없을 것이다.
현실의 아버지가 맏딸을 내치면서까지 함께 살고 싶어 한 여인은 정작 행복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버지가 바다에 있던 어느 겨울, 여인은 전세금과 통장의 돈을 몽땅 들고 달아났다.
아버지는 배에서 아주 내렸다.
새벽에 해산물을 사 와 밤에 포장마차를 하고, 낮에는 여인을 찾으러 다녔다.
우리 세 남매는 어느 동네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단칸방에 구겨 앉아 텔레비전을 봤다.
여인은 곧 잡혔다.
아버지에게 끌려 와 방에 던져진 여인은 울었고, 맞았고, 소리쳤고, 또 맞았다.
우리는 작은 부엌을 끼고 ‘ㄱ’ 자로 배치된 방 두 칸의 작은 집으로 이사했다.
골목 끝에 있는 집이었다. 여인은 방에서 거의 나오지 않았다.
아침이면 우리는 여인과 아버지의 방문을 두드려 준비물 값을 받아 학교에 갔다.
열린 방문 사이로 보이는 여인은 벗은 상반신을 반쯤 드러낸 채 누워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우리는 아버지가 맨밥에 마가린과 간장을 섞어 비벼주는 밥으로 저녁을 때우곤 했다.
고요한 긴장에 휩싸인 그 집에서 나는 불안했다.
뭔가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뭔가 더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
공기처럼 떠도는 불안 속에 한 학기를 보내고 있던 어느 날 하굣길, 어머니를 봤다.
그녀는 집 앞 골목 어귀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못 본 세월이 길었기 때문인지, 아버지에게 들킬까 봐 겁이 났기 때문인지, 5년 만에 만난 어머니가 불편하고 어색했다.
무슨 말을 나누었는지, 그녀가 왜 온 것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이후로 그녀를 본 적 없다.
어머니는 전쟁 중에 고아가 되어 여동생 하나를 데리고 남쪽으로 피난했다.
피난길에 팔에 총을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던, 동생 또래 여자아이를 업고 걸었다.
그 와중에 친동생의 손을 놓쳤다. 그렇게 그녀는 하나 남은 가족마저 잃었다.
이후 성인이 되어 일군 가정이 남편 손에 부서지면서 그녀는 또 가족을 모두 잃었다.
그런 사람의 마음에서는 어떤 욕망도 싹틀 수 없었을까.
어머니는 아버지의 계략으로 부당한 이혼을 당한 후 술과 무력감에 빠져 세월을 보내다 시립요양원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거듭되는 상실 속에 욕망조차 잃은 어머니와 아주 다른 사람이었다.
자식과 재산을 잃는다 해도 함께 하고 싶어 했던 여인에 대한 그의 감정이 욕정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랑일 수도 있고 집착일 수도 있다.
전쟁통에 고향과 부모를 잃은 소년의 두려움과 그리움이 초래한 부작용인지도 모른다.
폭격당한 배 안에서 동료들의 신체 일부가 몸 위로 쏟아지던 베트남 전쟁의 참혹함이 남긴, 비틀린 생명 충동인지도 모른다.
그 내용이 무엇이었든, 아버지는 여인이 준 어떤 즐거움을 결코 놓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오늘날 행복 심리의 권위자로 인정받는 대니얼 길버트는 행복이란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무언가를 지칭하기 위해 우리가 붙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 전자책 25쪽, 34~36쪽).
그에 따르면, 무엇이 우리를 즐겁게 하느냐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각자의 행복 경험들에 공통점이 있다.
우리가 어떤 즐거운 경험을 하고 나면 그 경험을 하지 않은 상태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즐거움을 스스로 버리기는 매우 어렵다.
옛이야기 속 오디세우스의 즐거움은 제우스에 의해, 하랄다의 즐거움은 경쟁자에 의해 강제로 중지된다.
하지만 현실 속 아버지가 붙잡으려 한 어떤 즐거움을 중단시켜 줄 이는 없었다.
순탄치 않은 아버지의 행복 좇기가 계속된 수년 동안 깊어져 간 우리 형제들의 불행을 눈여겨보아 준 이도 없었다.
70년대 한국에서는 무력 통치가 정부의 권리였듯, 폭력과 방임이 가장의 권리였다.
그러니 이웃에서든 학교에서든 알아채야 할 신호로조차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조용하고 불길한 신호음은 우리 세 남매의 귀에만 들렸다. 오고 있다, 다 와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