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유기된 자의 분투기
작은 트럭에 실린 짐이 도착한 곳은 인천 만수동이었다. 손바닥만 한 콘크리트 마당을 ‘ㄷ’ 자의 작은 주택이 둘러싸고 있었다. 대문을 등지고 서면 가운데와 오른쪽이 안채이고, 왼쪽이 우리 방이었다. 작은 부엌이 딸린 작은 방.
그 방에 들어설 때 나는 어리둥절하고 걱정스러웠다. 이 작은 방에서 다섯 식구가 어떻게 살지...
기우였다. 다섯 식구가 아니었으니까. 그 방에 들어온 짐은 우리 물건뿐이었다. 부엌에는 작은 찬장 하나, 작은 쌀통 하나, 식기 몇 개, 석유곤로 하나가 놓였다.
여인과 아버지는 며칠 후 다시 오겠다고 했다. 그러니 나는 밥 잘하고, 오빠는 동생들 잘 챙기고, 막내는 언니 오빠 말 잘 들으라고 한 후 가버렸다.
여름 방학 내내 그들이 몇 번이나 왔더라. 기억나지 않는다. 내 몫이 된 식사 준비, 내가 뭘 요리했더라... 기억나지 않는다. 석유곤로에 불을 붙여야 하는 순간의 두려움만 또렷이 기억한다.
도화동에서 다녔던 학교에서 과학장이라는 걸 했었다. 단계별로 이런저런 과제를 수행해야 했다. 과제들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너무나 무서웠던 작업이 하나 있었다. 알코올램프에 불을 붙이기 위해 성냥을 긋는 일. ‘팍’하고 불이 붙는 순간 겁을 먹어 성냥 자루를 놓지 않으려고 기를 써야 했다.
그런데 이제 하루에도 몇 번씩 성냥에 불을 붙여야 밥을 먹을 수 있다니...
여름 방학 내내 두려움과 슬픔을 외면하기 위해 텔레비전 방영 시간에는 텔레비전을 봤다. 텔레비전이 안 나오는 시간에는 여인이 들여놓았던 세계위인전기전집의 책들을 읽었다. 뜻밖에 재밌었다.
소년 링컨이 집이 가난해 학교에 가지 못했다. 독서를 좋아했던 소년은 누군가에게 책을 빌려 읽었다. 그런데 그 책을 물에 젖게 했다. 링컨이 자신의 실수를 고백하고 상대가 그를 용서하는 장면에서 얼마나 안도했던가.
개학 날, 아버지가 와서 우리를 새 학교에 전학시킨 후 얼마간의 돈을 주고 다시 갔다. 끝이었다.
연락도 돈도 끊겼다.
먹을 것도 돈도 없는 방에서 중학교 1학년이었던 오빠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했던 일을 따라 했다.
동생들 매질하기.
그러나 결국 오빠는 굶는 동생들을 먹이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그릇 가게에서 자전거로 그릇 배달하는 일을 시작했다. 오빠는 그곳에서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해야 했다. 오빠는 가게에서 잠을 자고 며칠에 한 번씩 집에 와 음식 살 돈을 주고 하루를 자고 갔다.
그런데 나와 동생은 오빠가 준 돈으로 쌀과 찬거리를 산 게 아니라 과자를 샀다. 그러니 돈은 오빠의 요량보다 빠르게 소진됐다. 돈이 떨어지면 동생과 나는 맨 밥을 먹거나, 라면도 없이 굶었다. 며칠에 한 번씩 와서 그 꼴을 보는 오빠의 매질은 횟수가 늘고 강도가 세졌다.
아마도 그때 누군가 오빠에게 왜 그렇게 동생들을 때리냐고 물었다면 열네 살 오빠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온종일 그릇 정리하고 포장하고 달리는 자동차들 사이로 유리그릇 실은 자전거를 몰아가며 번 돈이라고요.
근데, 그 돈으로 과자나 사 먹고 굶고 있잖아요. 먹다 남은 음식을 그대로 둬서 냄비에는 곰팡이가 펴 있고!
나는 죽어라 일하는데 동생들은 종일 놀면서도 이 꼴인데 내가 얼마나 화가 나겠냐고요! 얘들을 나한테 어떻게 하라고...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나도 학교 가고 싶어요.”
오빠가 얼마나 무섭고 힘들고 화가 나 있는지 그때도 알았다. 과자로 낭비하지 않는다 해도 끼니를 때우기에 부족한 돈이었다. 하지만 그만큼을 벌기 위해 오빠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지금은 더 잘 안다.
그래도 무서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오빠가 집에 오는 날이면 동생과 나는 잔뜩 오그라들었다. 동생은 숨도 크게 못 쉬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나를 두렵게 하는 진짜 무서운 일은 이듬해 벌어졌다. 오빠가 없을 때 내가 동생을 때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따금 배가 아프다고 우는 동생의 말은 못 들은 체하면서... 언니에게까지 맞게 된 동생의 마음은 이랬을 것이다.
“언니가 때리는 게 더 무서워요. 하루 종일 같이 있는데 자꾸 화를 내니까... 나는 배가 너무 아픈데 말해도 안 듣고... 가끔 언니가 친구 집에서 자고 안 들어오는 날은 귀신이 나올까 봐 너무 무서운데 때릴 사람이 없어서 마음이 편하기도 하고...”
오빠는 오빠대로 나는 나대로 각자의 두려움과 절망에 갇혀 있었다. 그 두려움과 절망으로 초등학교 2~3학년이었던 어린 동생의 세상을 우리가 겪는 지옥보다 더 참혹한 지옥으로 만들었다. 끝 모를 굶주림과 추위 속에서 우리는 그렇게 망가져 갔다. 우리가 때리고 맞고 울어도, 주인집에서든 담이 붙어 있는 이웃집에서든 누구도 오지 않았다.
“시끄러워! 그만 좀 해!”
언젠가 주인집 아들의 한마디 외침이 전부였다.
제발 누가 말리러 와 주기를 내가 바랐던 몇 배로 동생은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늘, 언제까지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1943년 7월, 26세의 나이로 반나치 활동을 하다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한 후 악명 높은 수용소들을 전전했던 장 아메리.
그가 살아남아 『죄와 속죄의 저편』(장 아메리 지음, 안미현 옮김, 필로소픽)에 쓴 가장 강력한 폭력은 고작 ‘첫 번째 구타’이다. 첫 번째 구타를 당한 자는 바로 그 순간, 다가올 또 다른 폭력과 죽음을 예감하며 ‘세상에 대한 신뢰’를 상실한다.
“다른 사람이 명문화된 혹은 명문화되지 않은 사회적 계약을 바탕으로 나를 보호해 주리라는 믿음, 그 사람이 나의 신체적 상황과 더불어 나의 형이상적 상황도 존중한다는 확신”(78~79쪽), 이것이 첫 번째 구타를 경험한 이가 상실하는 세상에 대한 신뢰의 내용이다.
성인조차 나와 사적으로 무관한 타인이 가하는 최초의 폭력으로 신뢰할 수 있는 세상에서 내던져진다. 하물며 그 폭력을 가족에게서 경험한 아이들은 어떨까.
아버지에게서 오빠에게로, 오빠에게서 내게로 이어진 폭력의 최대 희생자는 가장 어린 동생이었다. 그러나 그에 앞서 오빠와 나 또한 무력하게 폭력에 노출된 피해자였다. 구타, 생존이 위협받는 일상,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절망감, 이 모두가 폭력이었다. 우리가 굶어 죽든, 얼어 죽든, 맞아 죽든 아무도 괘념치 않는 곳. 우리가 한 세상에서 내쳐져 새로이 내던져진 세상은 그런 곳이었다.
자꾸만 배가 아프다고 울던 동생이 결핵성 복막염을 앓고 있었다는 건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알았다. 죽음을 미처 알지도 못한 채 죽어가던 어린 동생의 몸은 삼중의 폭력에 처한 우리 세 남매의 내면이기도 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끔찍한 아동 학대에 대해 알게 된 지금, 우리 남매가 맞닥뜨렸던 폭력이 최악은 아니었으니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까. 이런 식의 비교와 자기 위로는 무의미하다.
어떤 유형의 폭력이든 그에 노출된 경험이 있는 아동은 심장에 깜빡이는 불씨 하나가 박힌 채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후 이 아동의 모든 삶은 그 불씨를 키워 자신을 태워 소멸시킬 것이냐, 캄캄한 동굴에서 나갈 길을 찾을 것이냐의 투쟁이 된다.
세상 어떤 아동도 경험하면 안 되는 투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