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유기된 자의 분투기
그날은 5월 5일이었다. 태어나 여덟 번째 맞는 어린이날.
우리 네 남매는 낯 모르는 아주머니와 함께 서울 어느 터미널에서 고속버스를 탔다.
휴게소에서 삶은 계란인지 핫도그인지를 먹었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우리 중 누군가가 심하게 게워 냈다.
멀미에 시달리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그들을 처음 만났다.
작은 아버지, 작은 어머니, 사촌 여동생, 사촌 남동생.
우리 네 남매는 약 1년을 울산의 작은 아버지 댁에서 살았다.
중학교 1학년이었던 언니는 그곳에 살기 시작하면서 학교에 가지 않았다.
언니는 집에서 청소하고 식사 준비를 돕고 식구들의 옷가지를 비벼 빨았다.
아버지가 언니에게 살림을 거들게 한 이유가 넷이나 되는 어린 자식들을 맡겨 두기 위한 전략이었는지, 모든 자식을 초졸로 끝내려는 계획의 시작이었는지 우리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우리가 그곳에 머무는 동안 아버지는 작은 아버지에게 얼마간의 생활비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돈 몇 푼에 시댁 애들 거두는 일을 반길 기혼 여성이 어디 있겠는가.
애초부터 작은 어머니는 아버지를 싫어했고, 그 아버지가 낳은 자식들을 싫어했다.
그 자식들이 주는 불편도 싫어했고, 그 자식들이 주게 될지도 모를 불편도 싫어했다.
단란한 가정의 침입자, 그게 우리였다.
작은 어머니가 안방문을 닫고 그 안에서 자신의 두 아이에게만 간식을 먹일 때 우리는 우리 처지를 거듭 이해했다.
간식을 달리 먹이거나 안 먹이는 일이 대수로운 차별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 행위가 사랑이나 미움의 발로라는 사실을 막연히 알았다.
나는 사랑받는 사촌 동생들이 부러울 뿐이었다.
하지만 언니는 부러워하면서 초라해지고, 초라해지면서 어른들의 눈치를 살피는 동생들을 보는 일이 속상했던 모양이었다.
어느 날 언니가 작은 어머니 몰래 우리에게 백도 한 개를 급히 나누어 먹였다.
내 차례가 돌아와 복숭아를 한 입 베어 입에 넣었다.
바로 그때 언니 손에 들린 복숭아 과육 사이로 커다란 벌레가 보았다.
놀란 나는 입안에 있던 복숭아를 내뱉었다.
그 순간, 나는 작은 어머니를 속이려 한 벌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작은 어머니는 좋은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일요일마다 헌금을 쥐어 우리를 교회에 보냈으니 말이다.
그때 외운 주기도문과 찬송가들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그해 교회의 크리스마스 행사에서 흰 티에 남색 바지를 입고 행사를 여는 인사말을 외워 읊던 기억도 난다.
외운 글을 잊을까 봐 얼마나 긴장했었는지도.
이듬해 그 집을 떠날 때 그들과 나누었던 인사는 기억에 없다.
다만, 다시 볼 일이 없으리라 느꼈던 마음은 기억한다.
연락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일도.
아주 나중에 나로서는 피치 못할 지경에 처해 이 불문율을 어겼다.
그때 작은 어머니에게 들었던 말을 어쩌면 1년 여의 더부살이를 마치고 그 집을 떠날 때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잘 살아도 연락할 거 없다. 너희끼리 잘 살아라.”
우리가 어떤 상황에 놓여도 세상에는 우리뿐이라는 사실을 마음 깊이 새겨 넣어 준 말이었다.
말은 허공에서 스러지는 소리이지만 때로 심장에 박혀 빠지지 않는 못이 되기도 한다.
작은 어머니를 통해 내가 세상에서 처음 맞닥뜨린 냉대의 책임이 작은 어머니에게 있지는 않다.
그녀는 제 가족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지 않겠는가.
그 냉대의 일차적 책임은 장차 있을 진짜 유기의 준비 운동을 한 셈인 아버지, 그에게 있다.
언니, 오빠, 나의 고향은 지금은 사라진 행정 구역, 진해이다.
아버지는 우리가 태어날 당시 해군이었다.
내가 취학하기 전 우리 가족은 서울로 이사했다.
우리가 진해를 떠날 당시 아버지는 원양어선 통신사였다.
그는 한 번 바다로 나가면 몇 개월 만에 집에 돌아와 서너 주 지내다 다시 나갔다.
그가 돌아올 때면 비린 생선들이 따라왔다.
언제부터인가 아버지도 생선도 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발을 끊고 소식을 끊고 돈을 끊었다.
연락 없이 지내온 당신의 동생 집으로 우리를 보냈던 날,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아버지는 이혼 소송에서 이겨 양육권을 가졌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접근조차 할 수 없다는 명령도 받아냈다.
이후 아버지가 한 일들로 미루어 볼 때 이 영악한 계략이 자식을 지키기 위한 아비의 고육지책이었을 리는 없다.
이유가 뭐였든, 영리한 아버지는 무일푼으로 아내를 내쫓기 위해 계획하고 실행하고 성공했다.
나의 생후 여덟 번째 어린이날은 아버지가 은밀히 준비해 온 가족 해체 계획을 드러낸 첫날이었던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그나마 자주 그리고 크게 보도되는, 상대적 약자에 대한 폭력(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 따르면 신체적, 정신적, 재산상 피해를 수반하는 행위)은 데이트 폭력이다.
아동에 대한 폭력은 피해 아동이 처참하게 죽었을 때만 대서특필되곤 한다.
그러나 국가통계포털 사이트와 여성가족부 사이트의 자료에 따르면 2022년, 데이트 폭력 피해를 경험한 여성은 350명, 어떤 관계에서든 폭력 피해를 경험한 여성은 435명이다.
한편 폭력(학대) 피해를 경험한 아동은 27,971명이다.
아동의 폭력 피해 가운데 성폭력을 포함한 신체 폭력만 5,520명이다.
이 글에서 주목하는 폭력 유형인 방임과 유기는 3,128명이다.
어떤 수치를 비교해도 데이트 폭력을 포함한 전체 여성의 폭력 피해보다 아동 폭력 피해의 수치가 훨씬 높다.
행인지 불행인지, 부모가 자녀를 유기하는 일은 어느 날 단박에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방식으로든 일종의 신호라 할 만한 행위들이 앞서게 마련이다.
그 신호들을 주위 성인이나 관련 기관이 알아채 줄 수는 없을까.
가정은 지극히 사적 공간이며 미성년 자녀의 양육과 교육은 일차적으로 부모의 책임이다.
그러나 사회의 유지와 발전은 가정을 기본 단위로 실현된다.
그러니 미성년자의 인권을 보호하고 건강한 사회의 일원으로 육성할 책임과 필요는 국가에게도 있다.
아동에 대한 방임과 유기는 그러한 상황에 처한 아동이 불행한 아동기를 보내는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한 인간이 끝이 안 보이는 어두운 동굴로 들어가는 입구에 지나지 않는다.
부디 그 동굴 입구에 눈 밝은 파수꾼을 세워, 어떤 아이도 그 안에 던져지지 않도록 지켜 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