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창업가의 스타트업 이야기

9. 일방적 계약해지 조항

by 이응진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서울의 가을 햇살이 회의실 테이블 위의 두툼한 계약서 초안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펜을 쥔 채, 맞은편에 앉은 MGK의 김상훈 대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HP중공업으로부터 그토록 원했던 공급계약서를 받았지만, 그의 눈빛에는 불안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김 대표님, 이 부분이 결국 이 계약의 가장 깊은 함정입니다."


나는 계약서 제12조 (계약의 해지)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상훈에게 계약서를 보여 주었다.


'갑'은 '을'에게 30일 전 서면 통지를 함으로써 본 계약의 전부 또는 일부를 언제든지 해지할 수 있다. 이 경우 '갑'은 '을'에 대하여 일체의 손해배상이나 손실보상의 책임을 지지 아니한다.


상훈을 만나기 전 날 이 조항을 읽으며, 상훈과 MGK가 짊어져야 할 재고 부담과 자금 압박 때문에 가슴이 답답해옴을 느꼈다. 내가 사업을 하면서 자금 압박으로 인한 고통을 직접, 그리고 아주 절절하게... 느껴 보았기 때문이었을까? 사업에 실패하고 다시 변호사로 돌아온 이후에도, 고객의 계약서를 검토하면서 고객에게 심하게 불리한 조항을 발견하면 비슷한 고통을 느끼는 일이 적지 않았다. 분명, 트라우마 때문에 생기는 증상일 게다. 그런데 내 이런 증상은 로펌의 영업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고객의 눈에는 내 이런 트라우마가 고객을 진정으로 생각하고 걱정해주는 모습으로 보였던 것인지, 변호사로 복귀한 후 고문계약을 체결한 기업들의 수가 꽤나 빠르게 늘어갔다. 나쁜 일이 꼭 나쁜 일만은 아니라는 것에 감사한다.


MGK는 스웨덴의 하이엔드 작업용 장갑을 수입하여 납품하는 회사인데, 주문 시점부터 수입통관 후 MGK의 창고로 배송이 완료되는 시점까지는 거의 3개월이 소요된다. 대금은 주문 확정 시점에 바로 지급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런데 HP에서 온 공급계약서에는 주문 시점부터 5영업일 이내에 납품을 완료하여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상훈은 고개를 떨구었다.


"변호사님, 이 계약은 지금 기준으로는 저희 매출의 60%에 해당하는 계약입니다. 특히 HP중공업이 요구한 방열 특수 스펙 장갑은 저희가 스웨덴 본사에 최소 4개월 전에 선발주해야만 겨우 맞출 수 있는 물량입니다. 그리고 이 특주품의 제조에 투입되는 개발비용을 커버하기 위해서 스웨덴 본사에서는 1년간은 최소주문물량(Minimum Order Quantity: MOQ)까지 설정할 것을 요구하고 있구요. 만약 계약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계약해지 통보가 오면 회사가 휘청거릴 수도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절박함이 묻어 있었다. 나는 상훈이 처한 벼랑 끝 상황을 정확히 이해했다. 대기업은 '임의 해지'라는 편리한 칼을 쥐고, 중소기업에게는 '재고와 자금 부담'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우는 전형적인 '갑'의 횡포였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김 대표님, 이 조항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MGK의 운명을 HP에게 맡기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HP도 우리 제품을 채택하는 것으로 내부 의사결정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공급계약서를 만들어서 우리에게 보내온 것입니다. 그러니 구매 담당자의 입장에서도 아주 비합리적인 조건을 요구하여 MGK와의 계약 협상을 파국으로 몰고 가는 것은 피하려고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역학 관계를 잘 활용해서 HP중공업 구매 담당자가 거부하기 힘든, 그리고 아주 정중하고 논리적인 수정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나는 파란색 마커를 들고 화이트보드 앞으로 나가 우리가 HP에게 제안할 계약 구조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MGK가 HP에 납품할 장갑은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MGK가 현재 다른 고객에게도 판매하고 있는 일반 제품라인이고, 다른 하나는 HP중공업의 작업 조건에 맞는 스펙으로 특별 제작한 특주품입니다. 특주품의 비중이 얼마나 될까요 김 대표님?"


상훈은 수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초기에는 30% 정도로 예상되는데, 시간이 가면서 특주품의 비중이 점점 늘어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1년 정도 후에는 오히려 특주품이 일반제품보다 더 많아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어갔다.


"물론 대등한 당사자들 간에 진행되는 계약 협상이라면, 일방적 계약해지 조항 자체를 삭제하고 어느 한쪽 당사자가 계약을 위반한 후 일정 기간이 경과할 때까지 위반을 시정하지 않는 경우에 비로소 계약을 해지할 수 있는 권한이 발생하는 표준적인 계약해지 조항으로 대체하자고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합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계약 상대방은 MGK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기업인 HP중공업이므로 이런 입장을 취하는 것은 납품의 성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특주품 때문에 전체에 대하여 해지기간을 최소 4개월로 해달라고 요구하면 HP쪽에서 받아들일 가능성은 0%에 수렴할 겁니다. 제 생각에는, 유형별로 협상을 진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HP중공업이 요청한 특수 제작 물량에 대해서는, 본사에 대해서 MOQ를 확약한 기간인 1년 동안은 계약을 해지할 수 없도록 하고 그 이후에도 최소한 우리의 발주 리드 타임(4개월)을 고려하여 해지 통보 기간을 120일(4개월)로 연장해 달라고 요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반 제품은, 우리의 리드 타임이 3개월이니 해지 통보 기간을 90일(3개월)로 연장해 달라고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일반제품의 경우에는 특주품과 달리 HP 이외의 다른 고객들에게도 판매가 가능한 제품이므로 2개월 정도로 해도 MGK에 아주 치명적인 피해가 발생하지는 않을테니, 나중에 협상 과정에서 3개월을 2개월로 단축하는 것으로 양보하면서 협상을 타결하는 것을 시도해 보는 전략으로 가는 것이죠."


설명을 듣고 있던 상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변호사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만일... HP쪽에서 일반제품에 대해서는 원안대로 30일로 하자고 강하게 나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으며 상훈에게 말했다,


"좋은 질문입니다. 그런 경우 하나의 대안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재고에 대한 보상금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해지 통보 기간을 30일로 수용하는 대신, 30일분에 해당하는 재고 납품 가격의 30% 정도를 HP가 MGK에게 해지보상금으로 지급하는 구조입니다. 이렇게 되면, HP의 입장에서는 필요없는 제품 30일분을 납품 받고 대금을 전액 지급하는 것보다는 부담이 작아지고, MGK의 입장에서는 수입원가의 상당 부분을 해지보상금의 형태로 보전받는 것이 되어 피해가 감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축소됩니다. 물론 이 제품들은 일반제품이므로 MGK가 시간을 갖고 다른 고객들에게 성공적으로 판매하게 되면 오히려 해지보상금으로 받은 금액만큼의 이익을 실현할 수도 있을 거구요."


상훈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져갔다.


"변호사님, 그러면 이렇게 해보시죠. 특주품에 대해서는 변호사님 제안대로 하고, 일반제품에 대해서는 해지 통보 기간을 60일로 하면서 30일분에 해당하는 일반제품 납품 가격의 30%를 해지보상금으로 지급해 달라는 것으로 계약서를 수정해서 보낸 다음, HP중공업 측의 반응을 보면서 기간과 해지보상금 수준을 양보하면서 협상 타결을 시도해보고 싶습니다."


상훈의 씩씩한 반응에 나는 다시 한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오... 김 대표님이 저보다 훨씬 터프하시군요. 좋습니다. 그럼 그 내용으로 12조 해지조항의 수정안을 준비하겠습니다. 아직 논의해야할 조항들이 몇 개 더 남았는데, 제가 오후에 법원 재판 일정이 있어서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내일 아침에 다시 만나 나머지 조항들에 대한 대응 전략을 협의하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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