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창업가의 스타트업 이야기

8. 첫 대규모 공급계약

by 이응진

타운홀 미팅이 끝난 뒤, MGK 사무실의 공기는 달라져 있었다. 정 이사의 갑작스러운 퇴사로 가라앉아 있던 분위기는 다행히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아직 불안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지만, ‘함께 싸워보자’는 보이지 않는 연대감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은 이제 단 한 곳, 울산의 ‘HP중공업’으로 향하고 있었다. 상훈이 타운홀 미팅에서 언급했던 ‘대규모 공급 계약’의 주인공이었다. HP중공업은 대한민국 제조업의 심장이라 불리는 울산에서도 손꼽히는 규모의 플랜트 설비 제조업체였다. 그들이 만약 매직 글러브의 고객사가 된다면, MGK는 단순히 월급날을 걱정하는 수준을 넘어 단숨에 손익분기점을 넘어서서 안정적인 성장 궤도에 오를 수 있었다. 상훈뿐만 아니라 투자자 영민도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인맥을 동원하여 HP중공업 계약 건을 성사시키기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HP중공업의 구매팀으로부터 온 공급계약서 초안을 상훈으로부터 메일로 전달 받은 것은 정 이사 퇴사 건으로 상훈이 나를 찾아온 날로부터 한달쯤이 지나서였다. 20페이지 정도 되는 계약서 초안을 이틀동안 검토한 후 나는 상훈에게 회의를 제안했다.


회의실로 들어서는 나를 보자, 상훈은 아이처럼 기뻐하며 나를 반겼다.


“변호사님! 드디어 왔습니다! 이제 살았습니다!”


그의 들뜬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애써 미소를 지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수많은 스타트업들이 대기업과의 첫 계약서에 섣불리 도장을 찍었다가 어떻게 ‘노예’가 되어가는지 숱하게 봐왔기 때문이다.


‘슈퍼 갑’의 위치에 있는 그들이 내미는 계약서는 보통 ‘을’에게는 족쇄나 다름없다. HP중공업에서 온 20 페이지짜리 공급계약서는 독소 조항으로 가득했다. 내가 독소 조항을 하나씩 설명하며 계약서를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길수록 상훈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갔다.


“이게… 이게 다 무슨 말입니까? 말도 안 됩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상훈의 뒤로 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김 대표님, 이게 현실입니다. 지금부터 우리가 할 일은 최선을 다해서 협상을 하는 것입니다. 절대 이대로 도장 찍으면 안 됩니다. 이제 반드시 협상을 해야하는 조항들을 하나씩 설명 드리겠습니다.”


나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상훈에게 우리가 협상해야 할 조항들을 하나하나 짚어주었다. 첫 조항은 대금지급 관련된 조항이었다.


"첫째, ‘검수 완료일이 속한 달의 말일로부터 90일 후 결제'라는 대금 지급 조항이 눈에 걸립니다. MGK는 스웨덴 본사에 선금을 주고 물건을 구매합니다. 그런데 판매 대금을 검수완료일이 속한 달의 말일로부터 3개월 뒤에 받게 되면, 스웨덴 본사에 물품 대금을 지급한 날을 기준으로 해서 보면 평균적으로는 5개월 정도 후에 대금을 받게 됩니다. 만일 월 5천만원 정도를 납품하게 된다면 5개월치 수입원가와 운송비, 판매관리비 등의 간접비용을 MGK가 감당할 수 있어야 하는데, 지금 MGK의 자금현황을 감안하면 어렵지 않을까요?"


상훈은 스마트폰을 꺼내어 계산기를 한참 두드려 본 후 대답했다.


"변호사님, 5개월치면 대략 2억 2500만원 정도입니다. 매출액 대비 수입원가 비율이 60%이니 월 3천만원이고, HP중공업 납품분 관련된 운송비와 판관비는 대략 월 1500만원 정도로 추산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월 4500만원이고, 5개월이면 2억 2500만원... 아... MGK의 현재 캐시플로우를 고려하면 너무 버거운 수준입니다. 하지만 제가 의류업체 영업팀장으로 근무할 때의 경험으로는, 대금지급 관련 조항은 우리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납품업체 대부분에 적용되는 회사의 정책이라 협상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일단 '납품일로부터 30일 후 결제'로 제안해보고 HP중공업의 반응을 보면 어떨까요?"


'오호... 김 대표가 많이 늘었는데?' 상훈의 의외로 차분한 반응에 놀라며 나는 다시 상훈에게 물었다.


"좋은 생각입니다. 우리의 마지노선을 '검수 완료일이 속한 달의 말일로부터 60일 후 결제'로 설정해 두고, 일단 HP에 보낼 계약서 수정안에는 '납품일로부터 30일 후 결제'로 조항을 수정해 두겠습니다. 그런데 만일 HP가 전혀 꿈쩍도 안하면 대책이 있으신가요?"


이 질문에도 상훈은 차분함을 잃지 않았다.


"창업중소기업 지원 중에 매출채권 담보대출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HP중공업은 신용도가 높은 회사이니 매출채권 담보대출을 활용하면 어느 정도는 해결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모자란 부분이 있으면 제가 어떻게든 해결하겠습니다."

"네, 좋습니다. 다음은 계약기간과 계약해지 조항입니다."




이전 07화실패한 창업가의 스타트업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