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내가 방송작가라니

원래 이렇게 얼레벌레 취직되는 거예요?

by 그웬

2년이었다. 정확히는 2년 5개월. 대학교를 졸업한 뒤, 첫 번째 직장을 갖기까지 무려 2년 하고도 5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29개월 동안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사회가 ‘취업 준비생’으로 정의하는 지루한 시간을 견뎌내어 ‘쉽게’ 방송작가가 되었다. 당시 내가 가지고 있던 스펙은 토익 910점, 오픽 IH, KBS 한국어능력시험 2+, 컴퓨터활용능력 1급이었다. 취업 준비생이라면 응당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자격증에 점수까지 갖췄지만, 서류 합격은 단 한 번에 불과했던 나는 우연한 기회로 방송작가가 되었다.


방송작가에 지원하게 된 계기는 동기 언니의 한 마디였다. 취업을 준비하던 당시의 나는 성취 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워 항상 시사 프로그램, 다큐멘터리 등을 틀어놓고 있었다. 이를 전해 들은 동기 언니와 친한 방송 작가분이 “20대 여자애가 시사, 다큐를 챙겨보고 있으면 방송작가를 해야지, 왜 헛물을 켜고 있대?”라는 소리를 했다는 거였다. 그 말을 들은 나의 자아는 탕 속에서 뛰쳐나와 외쳤다. “방송작가!”


그렇게 방송작가 구인 공고에 지원서를 내게되었다. 안타깝게도 첫 번째 지원에서는 서류 탈락의 고배를 마셨지만, 두 번째 지원에 덜컥 합격하여 정신 차려보니 방송작가가 되어 있었다. 첫 출근 때 가져간 아이템 기획안이 얼마나 처참했는지는 설명하지 않겠다. 하지만 근성과 끈기에 더해 신입의 필수 덕목인 열정으로 무장한 채 막내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지만, 정말 쉬운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시간이었다. 막내 작가에게 어렵지 않은 건 어려워하는 일뿐이었다. 하지만 어렵다고 투정 부릴 시간도, 하소연할 시간도 없었다. 그저 어렵다는 생각을 머릿속으로 되풀이하다 보니 어느새 1년 반이란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갔다. 장기 다큐멘터리가 끝나갈 때쯤 나는 잠깐의 휴식을 바라고 프로그램을 모두 그만두었다. 하지만 취준생 때는 어렵던 취직이 왜 이렇게 쉬운지. 휴식 대신 출연자의 제안으로 스타트업에서 4개월 간의 정규직 생활을 맛본 뒤 다시 방송국으로 복귀했다.


이후는 전과 같은 삶이었다. 섭외가 안 되면 절규하고 촬영장에서 눈코 뜰 새 없이 뛰어다니다가 밤새 편집실에 갇혀있는 평범한 방송쟁이의 삶. 보통의 일상이 끝나게 된 건 방송작가를 시작한 지 딱 만 2년을 채웠을 때였다.


“작가님, 혹시 입봉 할 생각 있어요?”


전화가 온 건 한창 촬영이 진행 중이던 때였다. 무슨 정신에 받았는지 모를 전화가 끊기고 끝없는 고민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내 머릿속에 든 생각은 오로지 ‘내가 입봉 해도 되나?’ 뿐이었다. 고민의 주된 이유는 나의 연차였다. 나처럼 만 2년을 채워 이제 막 3년 차가 된 작가는 일반적으로는 서브 작가로 전직한다. 막내-서브-메인의 체제에서 서브 작가는 주로 전체 프로그램 중 10분 내외의 한 꼭지를 구성하지만, EBS는 막내-메인 체제로 서브 작가를 두지 않는 방송국이었다. 그런고로 고작 3년 차의 나에게 들어온 제안은 45분 물의 메인작가였다.


누군가에게는 '다시없을 절호의 기회!'로 보였을 수도 있지만, 나에겐 지옥으로의 초대장처럼 느껴졌다. 5분 vcr 구성도 짜본 적 없는 내가 45분 구성을? 할 수 있나? 없지 않나? 이게 말이 되나? 내가 할 줄 아는 거라곤 어려워하기, (자동화되어 있는) 숨쉬기 정도인데 이런 내가 메인작가를 한다? 심지어 막내 작가도 없어서 작가라고는 나 혼자라고? 젠장!


e40a8d5b41dabf3e253c453271af93cc.jpg 이마를 빡빡 친 결과.jpg

끝없는 고민 속에 이마를 빡빡 쳤지만, 당연히 이마만 아플 뿐 아무런 결론도 나오지 않았다. 이럴 땐 무속신앙이지! 사주도 보고, 타로도 보고, 선배를 찾아가 상담도 해보고 정말 할 수 있는 오만 걸 다 해본 결과, 내려진 결론은 ‘못 먹어도 Go’였다. 솔직한 내 심정은 ‘못 먹는데 왜 먹어야 해요?’였다. 하지만 방송국 사정이 어려워지며 막내 작가들의 입봉이 힘들어진 상황에서 다시는 오지 않을 수도 있는 기회였다. 결국, 나는 울며 겨자먹기로 먹어야만 했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뻥이다) 프로그램에 합류하기로 한 뒤, 방송작가를 시작한 이후 죽고 싶은 3개월이 시작되었다. 눈물을 줄줄 흘렸고(이건 진짜다) 잘 시간이 없어서 노트북 앞에서 버티고 버티다가 못 일어날까 봐 불을 다 켜놓은 채로 소파 위에서 쪽잠을 잤다. 게다가 걸어가면서도 노트북으로 원고를 썼던 지옥의 입봉기,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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