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내가, 내가 백수라니!
“예, 괜찮습니다. 허허허.”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내가, 내가, 백수라니! 눈물을 흘리며 이마를 빡빡 치며(진짜 쳤다) 치러낸 입봉이었다. 프로그램이 폐지되지도 않았고, 피디님이 프로그램을 그만두지도, 옮기지도 않았으니 순조롭게 재계약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던 그때, 전화가 왔다. 프리랜서로 사실상 똑같은 처지였던 피디님은 그저 윗선의 이야기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인사권은커녕 촛불 하나 끌 입김도 없었던 피디님은 그날 윗선에서 작가 교체를 원한다는 이야기를 전하며 그렇게 미안해했다. (내 입봉의 9할은 당신 덕분이었어, 이피디!)
그렇게 나는 백수가 됐다. 눈 떠보니 백수라니. 내일부터, 아니지, 당장 전화가 끊어진 그 시점부터 난 아이템을 찾을 필요도 섭외를 할 필요도 구성안의 고통 속에 몸부림칠 필요도 없어졌다. 이게 맞나? 당연히 틀렸지! 당장 뱅크샐러드를 켜서 숨만 쉬어도 나가는 한 달 고정비와 숨을 쉬려면 필요한 생활비를 체크했다. 내가 지금 돈이 얼마 정도 있으니까 좋아! 당장 지금부터 일을 구해야하네! 끔찍.
사실 프로그램에서 잘릴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일을 시작했을 때부터 잘한다는 소리도 곧잘 들었고, 남들에 비해 빠른 입봉도 어떻게 서든 해냈으니까. 이런 내가 잘린다? 그런 건 보기에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잘렸죠? 그래, 차라리 지금 겪어보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어! 라는 생각으로 분연히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 일자리를 찾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개편 전 FA 시즌에 백수가 되어 지원할 곳은 생각보다 많았다.
문제는 내 상황이었다. 일반적인 방송작가와는 다른 루트를 타버린 바로 나! 보통의 방송작가는 막내(취재)로 시작해서 서브작가를 거쳐 메인작가로 자리를 잡는다. 하지만 서브작가라는 롤이 없는 EBS 구조상 나는 취재작가에서 냅다 45분 종합 구성물의 메인작가로 진화해 버렸다. 한 마디로 다른 방송국에서는 서브작가여야 하는 연차가 메인작가를 달아버려서 일종의 혼종이 되어버린 셈이었다. 그럼, 이제 구인하는 입장에서는 이런 딜레마에 빠진다. 서브작가 연차지만 메인작가를 해봤으니까 불러서 일 시키면 개이득 vs. 서브작가 연차이기는 하지만 이미 메인작가를 달아버렸으니까 서브작가를 시키면 서로가 피곤해질 수도.
여러 프로그램에 서류를 내본 결과, 많은 수의 사람이 주로 후자로 생각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서류에서 꽤 많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내가 밀어붙일 건 뭐든 시켜만 주시면 다 한다는 돌쇠 마인드를 보여줄 자기소개서뿐이었기에 자기소개서에 공을 들였다. 결국 진심이 담긴 자기소개서 덕분에 다큐멘터리의 메인작가로 합류하게 되었다. (이때 내 자기소개서를 믿고 날 택한 신피디, 최고야.) 날 입봉시킨 게 이피디였다면, 메인작가로서의 나를 붙잡아준 건 신피디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다큐멘터리를 한 편 말았더니 피디님이 프로그램을 옮기게 되면서 다시 실직자 신세가 됐다, 야호! 그렇지만 죽으란 법은 없다고, 다시 강연 프로그램에 서브작가로 합류해 좋은 메인작가님과 함께 일할 수 있게 됐고 3개월 뒤에 프로그램이 폐지됐다(^^)! 삐끗하면 백수가 되어버리는 프리랜서의 삶, 짜릿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