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또 쓰는 것일까요.
대형 서점의 빽빽한 서가를 바라볼 때마다, 나는 존재론적인 질문에 직면하곤 합니다.
“이 무수한 텍스트 속에서, 나의 언어는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어쩌면 글을 쓴다는 것은 애초에 무모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책을 출간한들, 그것은 찰나에 불과하고, 곧 망각의 서가 뒤편으로 사라지는 것이 대부분의 운명입니다.
지난 여름방학 동안, 학교 도서관에서 수백 권의 폐기도서를 분류했지요. 그중에는 단 한 번도 대출된 적 없는 책도 수두록 했습니다.
이름조차 불리지 않은 책들. 펼쳐지지 않은 생각들. 그리고 긴 침묵.
그 텍스트들의 사라짐에 연민을 느꼈고, 동시에 하나의 윤리적 결단 앞에 섭니다.
“쓰지 않고 완전히 소외되는 것과, 작게나마 존재의 흔적을 남기는 것 중 나는 무엇을 택할 것인가.”
나는 후자를 선택하기로 한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도 생로병사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유한성은 인간 삶의 본질적인 조건이자 출발점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유한함에서도 돌도끼에서 AI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진보하고, 문명을 쌓아 올려왔지요. 삶을 화려하게, 편리하게, 우주로 확장해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폭우로 내리는 춘천의 비를 가뭄에 타는 강릉에 내리게 하지 못합니다.
여전히 병들고, 고통받고,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자연 앞에서는, 삶의 실존 앞에서는, 우리는 그저 흔들리는 갈대에 불과하지요.
이처럼 인간의 삶은 한계의 연속이지만, 바로 그 유한성 속에서야말로 삶의 의미를 묻는 일이 가능해집니다.
외적인 성취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살아내려는 내적인 태도라 생각합니다.
인간 존재 의미는 무한한 가능성에서가 아니라, 제한된 조건 속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는 의지 속에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불완전함을 수용하면서, 타인과의 관계를 만들고, 자연과 공존하고, 고통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연민과 사랑을 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삶의 의미는 외부로부터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 한계를 응시하며 살아가는 내면의 결기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글쓰기 역시 존재와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사라짐을 향한 행위인지도 모릅니다.
말과 글은 언제나 넘쳐납니다. 의견은 쏟아지고, 문장은 범람합니다.
그 많은 글들 중에서, 진정 ‘필요한 글’이란 얼마나 될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믿습니다.
모든 텍스트는 누군가에게는 무의미할지라도, 또 누군가에게는 생의 균열을 비추는 빛이 될 수 있다는 것을요.
단 한 줄의 문장, 단 하나의 문단이 어떤 이의 내면에 닿아, 작은 숨결처럼 흔들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내 글이 세계를 바꾸리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내면에 솔바람처럼 스며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습니다.
그래서 쓰고자 합니다.
지금 여기에, 나의 단편적인 생각과 보잘것 없이 살아온 삶의 편린을 꾹꾹 눌러 언어라는 그릇에 담습니다.
또, 이 말은 어쩌면 사족일지도 모릅니다만
솔직한 동기를 말하지 않고는 이 글을 마무리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금년 5월, 스승의 날.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나를 기억해준 한 제자가 축하 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살아오면서, 선생님께 들은 말이 가끔 큰 에너지가 되었어요.”
내가 흘려보낸 말이, 누군가의 삶 어딘가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제자의 메시지가 자판 위에 손을 얹게 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글 쓰기를 선택한 지극히 개인적이고, 현실적인 이유가 또 있습니다.
나이 들면서 가장 두려운 치매를 예방할 수 있을거란 생각에서이고
혹, 기억이 흐려지더라도 나의 마음과 생각을 담아낸 작은 증언으로 남을 수 있기를 바라서입니다.
나의 글쓰기는
그저 한 인간으로서, 사라짐 앞에서의 작은 윤리적 몸짓일 뿐입니다.
순서가 늦었지만 제 글을 읽는 분들을 위해 나의 글쓰기 동기와 목적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