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신사리

부처님 진신사리가 우리나라에 있다구요?

by 뜨레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 드라마 집필 중이다.

조선왕조실록에 “퐁당” 빠져 살던 중, 우연히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태조 이성계가 명나라로 몽땅 보냈다는 기록이 있어 살펴보았다.

명나라 황제 영락제의 칙서에 따라 비단 30 필을 받고 전 사찰에 보관 중이던 석가모니의 불골과 진신 사리를 ‘황엄’이라는 명나라 사신을 통해 명으로 보낸 태종실록 그대로를 옮겨본다.

1407년 5월 18일 (태종실록 13권, 태종 7년 5월 18일)

사신 황엄과 기원이 받들고 온 사리를 청하는 황제의 칙서

조정 사신(朝廷使臣) 사례감 태감(司禮監太監) 황엄(黃儼)과 상보사 상보(尙寶司尙寶) 기원(奇原)이 칙서(勅書)를 받들고 왔다. 칙서에 이르기를,

"들으니 왕의 아버지가 전에 사리(舍利)를 가지고 있었는데, 천보산(天寶山) 등치에 있다고 하므로, 지금 태감 황엄 등을 시켜 그것을 맞아오게 하는 바이니, 하나하나 보내 줄 수 있겠는가? 아울러 채단(綵段)(고급비단)으로 왕과 왕비에게 주니 이르거든 영수(領收)하라. 왕과 왕비에게 각각 채단 30 필을 준다. “

명나라 황제 영악제의 칙서

1407년 5월 18일 명나라 황제 영락제가 태종 (이방원)에게 보낸 칙서이다.

왕의 아버지 이성계가 사리를 어디에 얼마나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명나라 황제 영락제는 이미 알고 있는 듯한 내용의 칙서이다.

칙서를 받은 태종의 다음 행보를 보자...,


임금이 칙사(勅賜) 155)를 받은 뒤에 엄(儼)이 중궁(中宮)에 들어가서 친히 왕비에게 주고 나왔다. 엄(儼) 등이 또 칙서를 싸 가지고 덕수궁(德壽宮)에 가니, 태상왕(太上王)이 병(病)이 있어 출영(出迎) 하지 못한다고 사양하였다. 엄(儼)이 말하기를,

"황제께서 주시는 것은 전내(殿內)에서 받을 수 없으니, 마땅히 백 보(步)밖에 출영(出迎)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태상왕이 이에 전문(殿門) 밖 백 보쯤 나와서 명령을 맞았다. 칙서의 말[勅辭]은 앞의 것과 같고, 준 채단도 또한 30 필이었다. 엄(儼) 등이 태평관(太平館)으로 돌아가니, 임금이 관(館)에 나가서 잔치를 베풀었다.

태상왕 이성계는 당시 병환 중이었음에도 사신 엄은 황제가 주는 것이니 백보 밖에서 받으라 하니 태상왕 이성계가 그에 따랐다는 기록이다. <두 주먹이 불끈 쥐어진다>

당시 명나라의 병력은 약 200만, 조선의 병력은 약 20만이었고 명나라의 토지 면적은 약 6,800,000 km, 조선은 약 220,000 km²로 조선보다 30배가 큰 대국이었으니 천하의 이성계라도 따르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짐작은 간다.

칙서를 받은 이성계는 이틀 후인 1407년 5월 20일 이성계가 보관 중이었던 사리 3백3매를 황엄에게 주었다는 기록.

태종실록 13권, 태종 7년 5월 20일 계유

태상왕이 사신 황엄에게 간직하던 사리 3백3매를 주다

태상왕(太上王)이 황엄(黃儼) 과기원(奇原)을 청하여 덕수궁에서 잔치하고, 태상왕이 보장(寶藏)해 두었던 사리(舍利) 3백3매(枚)를 내어 황엄에게 주니, 엄이 매우 기뻐하여 머리를 조아려 받고, 단자(段子) 2 필과 마른 오매(烏梅)·얕아요(椰瓢) 등 두어 종류를 드리었다.

이후 1407년 6월 6일 태종 이방원은 이성계가 가지고 있던 사리 3백 개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사리 100개 그리고 각 절에서 가져온 사리 4백 개 도합 800개를 은합에 싸서 조선의 사신 이귀령을 통해 보냈다는 기록인데, 명나라 사신 황엄은 태상왕의 사리 303개를 받고 만족한 듯 돌아갔는데 사찰을 뒤져 추가로 사리 800개를 모아서 사신을 통해 자진 납세했다는 기록은 선뜻 납득하기 어렵다.


태종실록 13권, 태종 7년 6월 6일

흠차관 황엄과 기원 편에 사리 8백 개를 올리다

황엄과 기원 등이 돌아갔는데, 임금이 이들에게 붙여 황제께 아뢰기를,

"삼가 신(臣)의 아비 신(臣)【휘(諱).】이 옛날에 간직하고 있던 사리(舍利) 3백 개[顆]와 신(臣)이 간직하고 있던 1백 개, 그리고 현재 관원을 보내어 경내(境內)의 여러 산에 있는 각 절[寺]을 두루 돌아다니게 하여 가져온 사리 4백 개, 총계(總計) 8백 개를 도금(鍍金)한 은합(銀盒)과 내 옥합(內玉盒)을 갖추고 밖은 은(銀)으로 싼 소함(小函)을 써서 담고, 소금황라복(銷金黃羅袱)과 채단(綵段)으로 만든 수(繡) 놓은 겹보(裌袱)로 싸서 배신(陪臣) 이귀령(李貴齡)을 보내어 받들고 가게 하였으되, 흠차관(欽差官)과 함께 가서 봉진(奉進)케 합니다. “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1419년 9월 8일 세종 즉위 1년

황엄이 이명덕 등과 흥천사에 가서 부처 뼈와 사리를 내어 태평관으로 가다

이명덕·원숙·원민생등이 황엄을 좇아 흥천사에 가서 부처에게 공양을 올리고 승려에게 시주하고, 석탑을 열고 석가여래의 정수리 뼈와 사리 4개를 내어서 태평관으로 받들고 돌아갔다.


그로부터 10일 후 - 1419년 9월 18일

황엄과 왕현이 돌아가면서 인경지(印經紙) 1만 장을 바쳤다. 상왕과 임금이모화로(慕華樓)에서 그들을 전송하고, 원민생을 보내황엄을 따라 가사리(舍利)를 〈명나라황제에게〉 진상하게 하였다. 그 주문[上奏文]에 말하기를,

"영락(永樂) 17년 8월 17일 흠차 내관(欽差內官)인 사례감 태감(司禮監太監) 황엄이 이 나라에 와서 성지를 전했는데, 이르기를, ‘조선국의 석탑과 사탑(寺塔) 속의 사리는 그 수효가 몇 게임을 묻지 말고 〈얼마가 되든지〉 다 보낼지어다. 그리고 다른 절 안에 있는 사리도 보낼지어다.’ 하여, 이 뜻을 받들어 신의 아비와 신은, 선조 강헌왕(康獻王)이 공양하고 가지고 있던 석가의 사리와 정골(頂骨) 069)및 국내에 두루 다니며 받아 가지고 온 제불여래·보살(諸佛如來菩薩)과 명승(名僧)의 사리를, 배신(陪臣) 좌군 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 원민생을 시켜 받들어 가지고 흠차관과 함께 가서 진상하게 하였으니, 사리의 수효는 총 5백58개의 존귀한 알이오."라고 하였다.


몇 개인지 묻지 말고 얼마가 되든지 다 보낼지어다. 그리고 다른 절 안에 있는 사리도 보낼지어다. “ 이쯤 되면 명나라 황제 영락제가 조선 사찰 등에 나누어 보관 중이던 부처의 진신사리와 명승의 사리 포함 도합 1,665개를 싹쓸이해간 이유가 궁금해진다..


영락제는 1368년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의 4남으로 조카 건문제를 죽이고 정난의 변

(靖難之變)이라는 내란으로 인해 황제에 올랐으므로 이방원처럼 왕으로서의 정통성이 없었다.

따라서 처음에는 유교적 황제였지만 불교에 심취 대규모 불교 사업을 추진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대장경(永樂北藏) 간행과 사리탑 조성이었다.


특히 부처의 사리(舍利)는 불교 세계에서 절대적 신성의 상징이었고, 황제의 보살행(菩薩行)과 정통성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자신을 “성왕(聖王)”으로 자리매김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현대의 평가다.

더구나 당시 조선은 유교 국가였기 때문에 사리의 중요성을 크게 내세우지 않았고, 영락제의 강력한 요구 앞에서 거절하기 어려웠던 이유로 조선의 사리란 사리는 대부분 명으로 보내게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에서 명으로 보낸 사리의 합은 실록 기록상 1,665과다.

그렇다면 도대체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는 몇과나 수습되었는지 다시 궁금해진다.


석가모니의 본명은 “고타마 싯다르타”이고 네팔에서 출생하여 인도 쿠시나가라에서 기원기원전 563년경 출생하셨고 80세에 입적하셨다.

“대반열반경” 및 “전승”에 따르면, 부처님은 열반 후 8과의 사리가 나왔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승들의 다비 후 사리 수를 기록에서 살펴보면,

성철 스님 110과, 혜암 스님 86과, 혜초 스님 71과, 효봉 스님 34와, 자운 스님 19과

탄허 스님 13과, 학명 스님 10과, 금단 스님 4과, 동산 스님 2과, 용성 스님 2과


따라서 부처님의 사리가 8 과가 나왔다는 것은 최초 기록상 명백하다.

그런데 약 200년 후 인도의 아쇼카왕이 상징적으로 84,000 탑에 봉안했다는 것을 기화로 그때부터 부처님의 진신사리는 84,000과 라고 말을 바꾼다. 얼마 전 티브 프로에서 어떤 통통한 스님이 부처님의 진신사리는 84,000개라고 설명하는 것을 보았다.


한편, 삼국유사에서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100과의 진신사리를 가져왔다고 전해지나 이를 부처님의 진신사리라는 것은 믿기 어렵고, 믿는다 해도 그나마 모두 명나라 영락제에게 받쳤으니 기록상 우리나라에 부처님 진신사리는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럼에도 부처님 진신사리는 국내 적멸보궁에 봉안 중이라는 것이 진실인지를 알아보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다.


진실을 찾아 부처님의 진신사리 8 과가 어떻게 나누어졌는지를 살펴보자,

인근 8개 인도 부족 국가가 나누어 가졌는데 그 나라는

1) 마가다국 (인도 비하르 주 파트나)

2) 베살리국 (인도 비하르 주 바이샬리)

3) 카필라국 (네팔 룸비니)

4) 알리카 파 (인도 비하르 주)

5) 람마나국 (네팔 나왈파라시) 현존 유일 원형 람마라마 사리탑 존재

6) 꾸시나가라 국 (인도 우타르프라데시 주)

7) 빵과 국 (인도 우타르프라데시 주)

8) 베트디프(인도 비하르 주 가야)

다시 정리해 보면, 인도에 6곳 네팔 2곳에 부처님의 진신사리 1과씩이 봉안되었음은 『대반열반경』, 『불본행집경』 통해 알 수 있다. 당시 진신사리가 더 나왔다면 더 나온 만큼 인근 부족 국가들이 나누었을 것은 명백해 보인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당시 북인도 전역에는 수백 개 의 부족 국가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후대 아쇼카왕이 84,000 탑에 봉안했다고 해서 부처님의 사리는 84,000개라는 주장은 우리나라 불교계에서의 설명이지만 이는 사실과 엄연히 다르다.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왕은 살아계셨다면 올해 2,293세이고 부처님보다는 정확히 300살 연하다.

부처님 열반 300년 후 부처님의 사리를 83,000개로 분신사리 한 아쇼카왕이 정한 숫자는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따라서 부처님의 사리 8과는 앞서 본 부족 국가에 1과 씩 봉안되었는데, 삼국유사에서 자장율사가 당나라 태종으로부터 부처님 진신사리 100 과를 받아 귀국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자장율사는 636년경 (선덕여왕 5년) 활동하던 승려로 당 태종이 부처님 진신사리 100 과를 주었다는 기록은 아쇼카 왕의 83,000개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여겨진다.

그마저 조선 초기 명나라 황제에 의해 전부 명으로 회수되었는데,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에 봉안 중인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있긴 한 것인지? 있다면 과연 누구의 사리인지 진심 궁금해진다.

가사, 없는 데 있는 것처럼, 있어도 부처님 진신사리가 아닌 것을 진신사리인 척 불상도 모시지 않고 절하게 하는 것은 명백한 사기다.

차제에 이를 바로잡아 불교가 추구하는 8 정도(八正道) 중,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을 다해야 하지 않겠는가를 묻고 싶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