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종인 Feb 28. 2024

콜로세움은 살아 있다

Nomad in Roma (11)

렌초 바르베라(Stadio Renzo Barbera)로 향하는 101번 버스는 이미 분홍과 검정으로 물들어 있었다. 나의 왼손은 버스 손잡이를, 다른 손은 '팔레르모 FC'와 테르나나 칼초'의 경기 입장권을 쥐고 있다. 그런 내가 신기한지 옆의 꼬마는 자꾸만 시선을 보낸다. 그가 귀여워 나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진다.


그러나 하차를 두 정거장 앞두고 나는 혼란에 빠진다. 티켓에 나의 국적이 북한(Corea del Nord)으로 되어 있다. 어쩐지 판매원의 눈빛이 묘하더라니! 여권까지 가져가서 보여주었는데도 이런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잠시 카라비니에리(Carabinieri, 이탈리아의 헌병)와의 실랑이를 상상한다. 어쩌면 입장을 거부당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설 수는 없다. 결전을 각오하고 티켓을 쥐지 않은 손으로 주먹을 쥔다. 곧 버스가 멈춘다. 분홍과 검정의 물결이 거리로 쏟아진다. 그 안에는 달마시안 같은 옷을 입은 나도 포함되어 있다.


곧 기름진 냄새가 난다. 경기장에 가까워졌다는 뜻이다. 핫도그, 샌드위치, 햄버거와 파넬레(Panelle, 시칠리아의 길거리 음식)를 손에 든 사람들이 보인다. 저녁으로 해먹은 파스타가 덜 소화된 탓에 사 먹기를 포기한다.


아낀 돈으로는 팔레르모의 머플러를 산다. 팀의 별명이자 상징색인 로사네로(Rosanero, 분홍과 검정)와 독수리가 수놓아진 머플러는 단돈 10유로. 1900년 11월 1일에 창단한 이 클럽의 역사는 2016년에 데뷔한 블랙핑크보다 무려 2세기를 앞선다.


핑크블랙 머플러를 두른 달마시안이라니… ‘어쩌면 방송사의 흥미를 끌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하며 다가올 결전을 준비한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입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폭탄이나 총 검류, 주류 등을 소지하지만 않는다면 이데올로기는 상관이 없는 모양이다. 어쩐지 싱거운 전개다.


묻고 또 물어 좌석을 찾는다. 나의 좌석은 Curva Nord. 팔레르모의 울트라스(열성 축구팬)가 있는 구역에 있다. 일찌감치 도착해 앉아 있는데 소년 여럿이 나를 에워싼다. 버스에서 본 그 눈빛들로, 기관단총처럼 쏟아내는 문장 중에는 다행히 아는 것이 몇 개 있다.


Quanti anni hai?

당신은 몇 살인가요?


Sei Giapponese?

당신은 일본인인가요?


만 나이를 칼 같이 적용해 서른다섯이라 말하고, 어제까지만 해도 친구였던 일본인들과는 분명한 선을 긋는다. 북한이나 중국에서 왔느냐고 물었으면 화가 났으려나.


근처에서 물끄러미 이 장면을 보던 청년이 영어로 말을 걸어온다. 인상도 인성도 좋아 보이는 그의 이름은 알레산드로(Alessandro). “신사는 숙녀가 필요로 할 때 떠나지 않는다.”는 명언을 남긴 축구스타 델 피에로와 같은 이름이다. 그 덕분에 나의 직관은 더 즐거워진다.



울트라스의 파괴적인 응원과 함께 팔레르모와 테르나나의 세리에 B(2부 리그) 27라운드가 시작된다. 리그 4위인 홈팀과 16위인 어웨이팀의 전력 차는 적지 않다.


그러나 경기는 테르나나의 선취 득점으로 시작해 팔레르모의 2:3 패배로 막을 내린다. 홈팬들은 아쉬움에 주저앉는다. 그러나 ‘Curva Nord’는 예외다. 경기 내내 단 한 명도 앉지 않았던 그들은 여전히 곧게 서서 북을 치고 소리를 지른다.


감사 인사를 마친 선수들이 라커룸으로 돌아간다. 실망한 아들의 머리를 아버지가 쓰다듬고, 난간과 기둥에 둘셋씩 아슬아슬 매달려 있던 응원단장들은 그제야 착륙을 시도한다. 전리품 없는 전쟁은 그렇게 끝이 났다. 나는 뻐근해진 종아리를 느낀다. 뜻도 모르는 응원가를 따라 부르느라 목은 오래전에 쉬어버렸다.


이제 30유로에 빌린 시민권을 반납할 시간이다. 나는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가장 늦게 경기장을 떠난다. 바닥에는 버려진 담배와 맥주병이 가득하다. 여운을 느낄 겸, 호텔로 돌아가는 길은 걷기로 한다.


여전히 핑크빛으로 물든 렌초 바르베라를 돌아보며 검투사와 사자, 전차와 포도주를 떠올린다. 어딘가에서 익숙한 응원가가 들려온다. 엉망으로 그것을 따라 부르는, 달마시안 한 마리가 밤의 거리를 걷고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