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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인 Mar 01. 2024

공주님을 기다리던 99일째 밤

시네마 천국 촬영지, 팔라초 아드리아노에서의 하룻밤

천국으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아침부터 내린 비는 비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굵었고, 호텔에서 터미널까지 택시를 타고 내리는 잠깐 사이 나의 모든 것을 적셔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천국의 유일한 통로인 AST(버스회사)의 정류장은 어디에 숨어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구원은 바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행하는 것이라 했던가. 터미널의 끝과 끝을 끝없이 왕복하는 고행 끝에 나는 정류장을 알현하고 가까스로 팔라초 아드리아노(Palazzo Adriano) 행 버스를 탈 수 있었다. 비 때문이었는지 버스가 늦어진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정류장을 찾는 과정에서 ‘gdfsh’님의 블로그가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이 자리를 빌려 그에게 감사를 표한다.


팔레르모 첸트랄레 기차역 맞은편 노점상이 모여 있는 거리에 있다.


‘gdfsh’님의 말마따나, ‘터미널 직원들조차 탑승 정류장이 어디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팔라초 아드리아노는 1988년 개봉한 영화 시네마 천국(Cinema Paradiso)의 주요 촬영지다. 팔레르모에서는 자가용과 버스로만 오갈 수 있으며 버스로는 편도 2시간 30분이 소요된다. 팔레르모에서 출발하는 버스는 하루 5대뿐인데 배차 간격이 멀다. 그 때문에 버스든 자가용이든 당일치기 여행자가 많고 숙박을 원하는 경우 나처럼 오래된 여인숙에 묵어야 한다.


버스가 산길을 달리는 동안 한 번 더 인터넷을 검색한다. 며칠 새 특별한 업데이트는 없다. 팔라초 아드리아노 여행자 대부분이 시네마 천국의 팬이며, 꼬마 토토를 연기한 살바토레 카스키오 씨가 아직 고향에 살고 있다는 것, 운이 좋으면 카스키오 가족이 경영하는 슈퍼마켓에서 성인이 된 토토를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 등이 여전히 같은 순서로 적혀 있을 뿐이다.


한편 날씨라는 변덕은 그새 태양을 불러낸다. 오전의 고행은 이미 아득히 먼 과거처럼 여겨진다. 차창 밖으로는 평화로운 산골풍경이, 귀가 먹먹해지는 것으로 고지대에 와 있음을 실감한다. 오후 1시 30분, 버스가 다른 산골 마을로 접어든다. 정류장에는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아이들 수십 명이 기다리고 있다. 아이들은 한니발의 카르타고군처럼 맹렬히 버스를 점령한다.


힐끔거리는 시선들이 낯선 동양인에게로 향한다. 그는 잔을 든 개츠비만큼이나 따뜻한 미소를 짓는다. 나는 시칠리아의 소년, 소녀들에게 좋은 교보재가 될 것이다. BTS와는 다른 스타일의 미남이 동양에 존재한다는 사례로...


곧 ‘Prizzi’라는 귀여운 이름을 가진 마을에서 아이들 한 무리가 내린다. 이제 남은 정류장은 종점뿐. 여전히 적지 않은 아이들이 버스에 남아 있다. 위키피디아에서 확인한 마을 인구는 2,000명 남짓. 나는 희망을 본다. 아이들이 자라는 마을에 미래가 있다는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메모하느라 한눈을 판 사이, 아이들이 하차를 준비한다. 나도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본다. 영화 속 노숙자가 ‘이 광장은 내 거야!’라고 외치던 바로 그 광장에 버스가 멈춘다. 나는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토토처럼 차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본다. 모든 것이 그대로 있다. 1988년, 내가 태어나고 영화가 태어난, 그때 그 모습 그대로.


팔라초 아드리아노의 풍경


여인숙 ‘Del Viale’에 짐을 풀고 마을을 둘러본다. 그새 어디로 갔는지 아이들은 없고 노인과 중년의 남성들만이 보인다. 그들은 광장과 주변 카페(간단한 음료와 맥주를 판매하는)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지만 내게는 먼저 가볼 곳이 있다. 저기 광장 한편에 우두커니 서 있는 시네마 천국 박물관(Museo Nuovo Cinema Paradiso)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한 남자가 나를 반긴다. 정확한 발음의 영어를 구사하는 그의 이름은 주세페, 별도의 입장료 없이 운영되는 박물관의 직원이자 가이드다. 주세페의 안내와 나의 감탄사가 오가던 박물관 투어의 한 지점에서 익숙한 사자 머리 조각상(Lion Head Statue)을 마주한다. 입으로 영화를 내뿜던 시네마 천국의 그 사자 머리다. 이윽고 나는 작품을 만든 사람이 주세페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박물관 투어도 잘 마쳤겠다, 내친김에 토토의 가족이 운영한다는 슈퍼마켓에 가보기로 한다. 마침 박물관만큼이나 가까이 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수요일에는 13시까지만 영업하고 목요일 8시에 다시 문을 연단다. 뭐, 내일 떠나기 전 방문하면 되니 큰 문제는 아니다. 어쩌면 운 좋게 길에서 토토를 만날지도 모르고.


저녁 식사로는 마을의 유일한 레스토랑인 ‘Del Viale’에서 칼조네(Calzone)를 먹었다. 그렇다. 이곳은 숙소 1층에 있는 피제리아다. 맛도 분위기도 훌륭하다. 유일한 투숙객을 위해 대형 TV로 시네마 천국을 상영해 주었을 때는 큰 감동이 찾아왔다.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시네마


별구경에 밤마실까지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광장에 자동차 예닐곱 대가 서 있다. 흥미로운 건 그 안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타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창문을 내리고 대화를, 어떤 이들은 라디오를 들으며 스마트폰을 만진다. 그러고 보니 낮에도 비슷한 풍경이었던 것이 떠오른다. 광장, 자동차, 그리고 사람들.


숙소로 돌아온 나는 그들이 왜 광장에 모여 있는 것인지 궁금해진다. 왜 자동차에 타고 있으며, 왜 아직 불이 켜진 카페와 바에 가지 않는 것인지를. 나가서 직접 물어볼까 하다가 그러지 않기로 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광장에 모이는 이유라는 건 언제나 하나뿐이라는 것을.


잠들기 전 밝아올 날의 버스 시간을 확인한다. 역시나 업데이트는 없다. 팔레르모행 버스는 6시와 7시, 그리고 14시에 정확히 광장에 도착할 것이다. 다만 아침 일찍 버스를 타면 8시에 문을 여는 코나드(Conad, 이탈리아의 프랜차이즈 마트, 토토 가족의 슈퍼마켓)에는 갈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마음은 이미 기울어 있다.


다음 날 아침, 잠들기 전 미리 싸놓은 짐을 들고 광장으로 향한다. 버스는 이미 도착해 있다. 그러나 기사는 버스를 움직일 생각이 없다. 시계는 어느덧 7시 14분을 가리킨다. 멀리서 누군가가 뛰어온다. 마지막 학생이다. 그가 탑승을 마치자 버스는 움직인다.


창밖으로 코나드가 보인다. 나는 공주와 병사를 떠올린다. 100일 밤낮을 발코니 아래에서 기다린다면 당신과 결혼하겠다는 공주의 말에, 줄곧 그녀를 기다리며 꿈쩍 않던 병사가 99일째 밤 스스로 그곳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그리고 남자를 생각한다. 팔라초 아드리아노의 ‘살바토레 카스키오’가 아니라 시네마 천국 ‘토토’의 삶을 살았을 한 남자를, 그러나 영화 속 토토와 달리 떠나지 않고 마을을 지켜온 한 남자를.


버스가 멈추고 아이들이 내린다. 나는 희망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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