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아 글, 이소영 그림 | 고래뱃속
마흔이 넘어 뒤늦게 진로 고민이 깊어졌다.
무작정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계획에도 없던 창업에 발을 들였다.
해본 적 없던 거라 모르는 것 투성이었지만 새로움은 기대를 가지게 했다.
기대가 실망이 되기도 하고, 긴장이 무기력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동안 내게 머물렀고 지나쳤을 카이로스는 여전히 내게 잠시 머무르기도 했으며 눈치 없고 준비 안 된 내 곁을 지나치기도 했다.
매일 수채화를 그리던 고흐만큼은 아니겠지만, 나는 매일 이 편지글을 마음으로 읽는다.
열심히 노력하다가 갑자기 나태해지고,
잘 참다가 조급해지고,
희망에 부풀었다가 절망에 빠지는 일을 또다시 반복하고 있다.
그래도 계속해서 노력하면 수채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겠지.
그게 쉬운 일이었다면 그 속에서 아무런 즐거움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계속해서 그림을 그려야겠다.
- 빈센트 반 고흐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
창업과 일상의 고민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나는 두 아이의 엄마다.
아이들이 어릴 땐 잠자리 독서를 자주 했다.
아이들도 좋아했고, 나도 그 시간이 좋았다.
아이들이 글을 읽을 수 있어도 잠자리 독서를 이어갔었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나태해지지 않으려 시작한 동네 도서관 봉사활동.
이제는 책을 좋아하지 않는 아이들에게 자연스러운 독서 환경을 만들어 줄 수 있을 것 같아 겸사겸사 시작했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아이들은 도서관을 즐기지 않았다.
그렇게 이 년이 지난 어느 날부터 초등생 딸아이가 매일 도서관을 간다.
독후감을 쓰는 숙제가 매일 있어 어쩔 수 없다고는 하지만 그러기에는 전보다 많은 책을 읽고, 읽은 책을 내게 공유해 주기 시작했다.
책은 좋지만, 책을 즐기지 않았던 나도 아이에게 건네받은 책을 읽으며 아이와 생각을 나누고 있다.
그리고, 아이의 생각과 마음의 성장을 지켜보며 나도 함께 성장하고 있다.
아이가 쓴 글
<편의점> 작가 이영아
이 책을 읽고 범수 아빠가 일하는 곳에서 다치고 난 뒤 쉬는 날이면 술을 마시고 범수에게 폭력과 욕을 해서 화났다. 그리고 범수가 방 창문으로 편의점을 보는데 거기서 맨날 오는 찬혁이라는 아이가 다른 사람이 먹다 남긴 음식도 먹고 편의점 형한테 혼나기도 하는 모습을 보니 찬혁이가 왜 맨날 편의점에 오는지 궁금했다. 또한 담배꽁초가 들어간 라면을 먹으려던 찬혁이를 범수가 도와주기도 했고 찬혁이가 범수한테 자기 자신이 거의 맨날 하는 큐브를 주는 걸 보니 행복해 보였다. 어느 날은 범수가 아빠한테 소주잔에 맞아 병원에 입원하게 됐는데 그때도 찬혁이가 병문안을 온다고 하고 새로운 큐브도 줘서 그나마 마음이 편안해지겠지만 아빠의 폭력으로 큰 상처가 남아있을 것 같다. 이젠 범수가 폭력과 욕설로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고 화목한 가정에서 지냈으면 좋겠다. 또한 찬혁이도 밤늦게까지 편의점에서 다른 사람들이 남긴 음식을 먹지 말고 더 좋은 음식을 먹으면 좋겠고, 할머니도 빨리 나아 행복하게 지내면 좋겠다.
성실하고 착한 범수의 아빠.
그런 아빠를 이용한 사람들.
사고로 친구를 잃고 몸과 마음에도 상처가 남은 아픈 아빠.
아빠는 몸에 술을 담아내고 왜 아들 범수에게 욕설과 폭행을 쏟아냈을까?
생활력 강한 범수의 엄마.
남편의 아픔은 이해하면서 생계에 매달리느라 아들 범수의 상처를 보지 못했던 엄마.
대단한 아내였지만 무심한 엄마는 문득문득 쓰고 짠 땀과 눈물을 흘렸겠지?
아빠의 쉬는 날은 어김없이 술을 마신 아빠에게 맞는 범수.
하지만 자신의 상처를 무심히 여기고, 집 앞의 편의점을 서성이는 찬혁이를 관찰하는 범수.
범수는 이미 아빠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었고, 결코 안전한 공간이 되지 못하는 범수의 집.
편의점을 서성이며 남이 먹다 버리고 간 음식을 먹던 찬혁.
할머니가 편찮으셨지만 이제 괜찮으셔서 편의점을 오지 않을 것 같다는 말은 진짜였을까?
찬혁이는 혼자 큐브로 외로움을 달랬던 걸까?
찬혁이는 어쩌다 할머니와 단둘이 살게 되었을까?
무언가 보호가 필요한 아이들이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두 아이에게 관심을 두지 못했던 편의점 주변 사람들.
매 페이지 삽화는 밝음과 어둠을 함께 그려낸 듯했다.
어두운 범수 방 창밖에 비치는 편의점 불빛.
편의점 앞 각자의 즐거운 만남이 있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표정이 없는 듯하면서도 불안과 긴장이 머물러있는 듯한 두 아이의 경직된 몸짓과 얼굴.
"엄마, 편의점 책 재밌지?"
딸아이는 범수도 찬혁이도 불쌍하다고 했다.
범수는 돌봄을 받지 못하는 찬혁이를 알아보고, 찬혁이는 폭력에서 아파하는 범수를 알아봤다.
현실에서는 이렇게 동병상련의 여운만으로는 두 아이가 건강하게 성장할 수 없을 것이다.
어른들과 사회의 책임으로 두 아이가 진짜 안전하고 안정적인 가정에서 성장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딸아이에게 추천받은 동화책을 읽고 있습니다. "엄마, 재밌지?" 물음을 시작으로 아이와 생각과 느낌을 나누며, 문득 이 순간을 기록하고 싶었습니다. 아이의 독후감도 저의 글도 나름의 생각 위주로 적어갔지만, 혹시 이 기록이 책의 출판사 또는 작가님께 누가 된다면 언제든 알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