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화려한 계절’

모른 채로 시작했기에 가능했다] Ep.7

by Annie


예비부부이자 2인 제작자. 60평 작업실 셀프 인테리어 중. 테이블웨어와 가구 제작을 시작으로 인테리어까지 손을 댔다.


낙엽이 떨어질 때쯤 가을이 왔음을 느낀다. 붉고 노란 잎들을 볼 때보다도 계절다움을 체감한다. 올해는 작업실에서 두 번째 가을을 맞는다.


약한 바람에도 잎사귀가 흩날려 떨어지고, 마른 낙엽과 가지들이 창 너머 수북이 쌓여간다. 일하는 공간이라 계절을 느낄 여유는 없다. 아름다움과도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이곳은 내게 가장 가을다운 곳이 되었다.


작업실에서 두 번째 맞는 가을



색 입히는 날

1) 작업실 보양 전


작업실 도색을 앞두고 보양을 하게 되었다. 보양은 페인트를 뿌리기 전 도색되지 않아야 할 부분을 비닐로 마스킹하여 보호하는 작업을 말한다.


그런데 왜 페인트 도장 전, 목공 기계가 들어오게 된 걸까? 더 어렵고 번거로울 것이 뻔한데 말이다. 맞다, 실제로 평평한 바닥을 마스킹하는 것보다 입체적인 물건을 감싸는 것이 훨씬 까다롭다. 하지만 가벽을 만들고 설치하는 작업을 직접 하기 위해서 기계가 먼저 들어와야 했다. 그 결과 보양에 시간이 얼마나 쓰일지 감이 잡히지 않는 상태로 작업이 시작되었다.


보양될 위치는 바닥과 창문 그리고 목공 기계였다. 작업실은 40평 이상이다. 이사 올 때부터 깔려있던 밤색의 장판과 검은색의 창틀을 그대로 살려 작업을 할 예정이기 때문에 바닥은 전부 랩 작업을 해야 했다. 그 외, 벽과 천장 그리고 가벽은 흰색 수성 페인트로 도장할 계획을 세웠다.


작업실 보양 전


2) 작업실 보양 후


전 구역의 보양을 마쳤다. 비닐이니까 잘라서 붙이면 되겠지 싶었지만, 보양 랩을 칼로 정확히 자르지 않으면 실처럼 꼬여 사용할 수 없게 되거나, 꼬인 랩을 푸는 데에 시간을 허비하게 된다.


작업실 층고가 높아 창틀에 테이프를 붙이려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했고, 창틀의 가장자리는 실리콘 처리가 되어있어 마스킹 부위가 자꾸 떨어졌다. 보양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외력에 떨어지지 않도록 잘 고정하여 부착하는 것이다.


작업실 보양 후



도색 전야, 준비를 마치다


우리는 삼화페인트에서 소개해 주신 철물점에서 수성페인트 스프레이 건을 빌려왔다. 스프레이 건 사용은 처음이었지만, 설명해 주신 대로 하면 문제없이 도장할 수 있겠다 할 정도로 간단했다. 철물점 사장님은 큰 대야에 물을 담아 기존 사용되었던 잔여 페인트를 전부 제거한 뒤 스프레이 건을 빌려주셨다.


페인트를 포함한 필요한 재료들(롤러, 작업복, 콤프레셔 등)을 넉넉히 준비했다. 비율에 맞게 페인트에 물을 섞어 개었고, 통에 기계를 살포시 넣었다. 이렇게 하면 스프레이 도장 준비는 끝이다. 압력 조절만 잘해주면 적정량이 분사되고, 몇 회 반복하여 도색하면 마무리가 된다. 스프레이 건 작업은 보양하는데 시간이 소요되나, 붓이나 롤러 작업보다 고르고 빠른 작업이 가능하다는 것이 장점이다.


시작된 도색 작업



무너져버린 몇 주간의 노력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분사가 되는 순간 페인트가 굵은 덩어리째로 튀어나와 벽이 버려졌다. 전 구역이 그랬다. 생각대로 작업되지 않으니 페인트 냄새와 함께 정신이 혼미했다. 온갖 벽과 천장에 튀어버린 덩어리들을 마르게 두었다가는 말끔히 마감해 둔 벽까지 문제가 생길 것 같았다. 서둘러 사다리를 오르락내리락하며 롤러로 덩어리를 평평하게 폈다. 콤프레셔도 문제없고, 페인트 농도도 이만하면 적당했다. 실패의 이유가 뭘까. 답을 내리지 못한 우리는 기계를 빌렸던 철물점 사장님께 전화를 드렸다.


“기계 문제는 아니고, 페인트에 물을 좀 더 섞어봐요.”


말씀 그대로 물을 더 부어 페인트의 농도를 묽게 만든 후 기계를 켰다. 그럼에도 두 번째, 세 번째... 반복되는 시도 끝에 정신력과 체력은 한계에 임박했다. 더 큰 문제는 준비한 페인트가 바닥났다는 것이었다. 스프레이 분사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서, 이곳저곳에 페인트가 낭비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급히 페인트를 다시 구매해 왔다. 묵직하게 나오는 페인트는 창문에 보양된 랩마저 떨어지게 만들었고, 돈도 페인트도 시간도 배로 쓰였지만 결국 엉망이 된 작업실을 보니 미칠 것만 같았다.


삼화페인트 사장님께 질문을 드렸다. 다행히 현장 경험이 많으신 분이라 스프레이 건에 사용할 페인트의 농도를 잘 아시는 분이었다. 페인트에 희석된 물의 비율을 설명드리고서, 작업된 현장 사진을 보여드렸다.


“물? 너무 많이 섞을 필요까진 없어요. 이 정도 묽기면 충분히 잘 뿌려지는데 왜 이러지? 기계가 문젠가...”


다시 작업실로 돌아가 도색에 들어갔지만 아무리 묽게 섞어도 작동이 되지 않는 기계를 보며 깨달았다. 조금만 농도가 진해져도 기계의 압력이 떨어졌고, 스프레이건은 작동되지 않았다. 처음 사용하는 기계라 우리 실수라고 생각했지만, 삼화페인트 사장님과 상의하고 깨달은 바는 기계 노후가 가장 주요 원인일 수 있겠다는 것이었다.


현장 사진



말 안 통하는 사장님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동안 깔끔한 벽을 만들기 위해 퍼티 작업을 과할 정도로 열심히 했다. 첫 작업실 인테리어였으니. “다음에 시공하면 이렇게까진 못할 거야. “라며 오빠와 웃으며 농담하곤 했다. 투자한 시간이 길고 몸은 고됐지만 마냥 좋았다. 그랬던 수고스러움이 덩어리 째 튀어나온 페인트로 인해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된 것이 아닌가.


기계는 하루 단위로 대여하기 때문에, 시간 내로 끝내지 못하면 하루치 비용을 추가로 지불하게 된다. 철물점 사장님께서는 기계에 문제가 없다며 못쓸 거 같으면 반납하라고 하셨다. 얼룩덜룩해진 벽을 앞에 두고 그럴 수는 없었다. 기계를 켜고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기계가 켜지며 덜덜덜 떨리는 소리가 나는 순간 빠르게 분사했고, 다시 소리가 멈추는 순간 탄식을 했다.


결국 철물점에서 가져와보라는 말을 하셨다. 우리는 원인을 찾아야 했다. 십 분 거리가 안되었지만, 사용하던 기계를 다 씻어내 가져가는 일은 보통 번거로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다만 어떤 상황이든 아쉬운 사람이 더 움직여야 하는 법이다.


고르게 분사되지 않은 벽과 천장



덧칠해도 가려지지 않는 것


찾아간 철물점에서는 다시금 대야에 기계를 씻어 물을 뿜어 보였다. 하지만 이미 그 상황을 알고 있었다. 물은 잘 나오지만 페인트를 넣으면 멈추는 것, 그게 문제였다.


“농도를 진하게 하니까 그렇지, 물을 더 섞어서 뿌리면 아무 문제가 없는 거예요. 물 잘 나오잖아요, 막히면 분사가 안 돼요.”


대화가 통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기계 문제로 작업이 지연됐고, 기계를 세척해 여기까지 온 이유가 물이 잘 나오는 것을 보려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작업실에서 해볼 것은 다 해보았다. 해는 점점 지고 날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시간이 없다. 차분히 말씀을 드렸다.


“묽게 분사를 해봤어요. 그런데 페인트를 넣으면 기계 압이 바로 떨어지면서 멈춰버려요. 쇼트 나듯이요. 삼화 페인트 사장님께도 농도를 여쭤보고 왔습니다. 이 상태로는 하루 만에 끝낼 수가 없어요. 사장님 말씀대로 물이 멀쩡히 나온다는 건 이해했지만, 페인트를 넣으면 고르게 분사되지가 않습니다. 하루치 가격으로 내일까지 대여 연장해 주시면 이 기계로 빠르게 끝내서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안 돼요, 그거 다른 사람도 빌려줘야 돼요. 우리도 손해예요”


“그럼 가격만 덜 쳐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알겠어요. 그럼 내일 오전까지 반납해 주세요.”


양쪽 다 서로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 되었다. 사장님은 물은 잘 나오니 전혀 문제가 없는 거라 생각을 하시며 우리 작업실 전력이나 페인트 농도를 문제 삼았다. 우리는 기계 자체에 문제에 초점을 맞췄다. 결국 사장님께서 다음날 오전까지 기계를 드리는 조건으로, 비용을 깎아주셨다. 우리는 허겁지겁 작업실로 돌아와 마무리를 해나갔다.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기계를 가지고서 페인트를 뿌려나갔다. 급한 마음과 빠르게 줄어드는 페인트, 대리석 위는 덩어리 진 페인트는 보기 싫게 굳어나갔다. 굳지 않은 덩어리들을 밟자 보양된 비닐은 신발에 쩍쩍 달라붙어 뜯겨나가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오빠와 나는 천장만이라도 끝내자며, “이쪽을 더 해야 돼!”라는 말을 연발했다. 기계 줄은 엉키고, 급히 뿌린 페인트는 서로의 얼굴 위로 후두둑하고 떨어져 앉았다. 쌓인 피로감과 답답함에 말보다 한숨이 많아졌다. 마스크를 써서 소통이 어려운 상황에 예민해진 채 결국 서로에게 화를 냈다. 지금 생각하면 웃픈 상황, 기계소리에 더해 마스크 안에서 서로 소리 높여 얘기하는데 전혀 들리지를 않았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힘들어야 했을까! 우리에게 시공 중 가장 힘들었던 날을 꼽자면, 단연 이 날이었다.



마무리된 작업실


그렇게 마무리된 작업실이다. 보양된 비밀을 벗기며 오빠와 그날의 감정을 공유했다. 둘 다 정해진 시간 안에 끝내야 한다는 압박감과, 노력해도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이어진 것이 원인이었다. 하소연하듯 내뱉은 서로의 말들이 날카롭게 받아들여지며, 화까지 내버리게 된 것이었다. 서로의 진심을 느끼고 미안함을 표하며 그날의 뾰족함을 참회하곤 웃음이 터져 나왔다. 비닐을 전부 벗기고 눈으로 훑어본 공간은 지쳤던 모든 순간을 충분히 보상해 주었다.


오빠와 함께하는 일은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행복하다. 다만, 가장 힘든 순간에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주지 못하면 쉽게 무너지고 만다. 초창기에는 일과 일상의 경계가 전혀 없었다. 자기 직전까지도 일 이야기를 나누다 잠들어버리거나 데이트를 해도 대화의 대부분이 일이었다. 이 시기는 일상의 비율이 간절할 정도로 부족했다. 그때 처음으로 일 외에 함께 갖는 휴식이 서로에게 큰 부분이었음을 깨달았다.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일을 해내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서 서로에게 마음 다할 시간을 만들기 위해 여전히 노력 중이다.


도색이 끝난 작업실



남기는 말


작년의 가을을 1년이 지나 돌아봅니다. 24년 가을은 지난 일 년을 통틀어 일이 많고 고된 시기였습니다. 감정적으로 격양된 날이 참으로 많았는데요, 날 서 있던 제 모습이 생생히 기억납니다. 이랬듯 저희에게 어떤 때 보다도 열정적인 계절이었습니다.


일이라는 게 넘쳐 힘든 분들이 계실 거고, 없어서 고단한 분들이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사업을 시작하며 두 가지 감정이 반복되는 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당장 오늘 아침만 해도 해야 할 것은 많은데, 실행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자괴감이 들어 버틸 수가 없더군요. 감당하지 못할 것을 지게 되면, 시작조차 하기 어렵게 되어버리더랍니다. 아이러니하죠. 하지만 자신을 지나치게 탓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냥 그렇게 되더라고요. 그런 나를 받아들이고, 할 수 있는 것부터 조금씩 해보기로 했습니다. 부디 더 나은 하루가 되시길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25년 11월


[모른 채로 시작했기에 가능했다] Ep. 8에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