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큰 형수님의 돌봄
벌써 50년도 넘은 일이다. 초등학교 다닐 때 우리 집 옆집에 아저씨 한 분이 혼자 살고 계셨다. 나이는 50세 정도 되어 보였다. 어느 날 그 아저씨가 어떤 여성을 데리고 왔다.
마을 주민들의 입이 바빴다.
"아, 이제는 혼자 살지 않고 여자를 데리고 와서 같이 사는구먼."
소문이 무성했지만 아저씨는 그 여성과 함께 살았다.
어느 날 그분들이 인사를 하러 우리 집에 왔다.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하는 중에 나는 어렸지만 뭔가 느꼈다.
아저씨 부인을 보니 약간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내가 모르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부인은 정신병(예전에는 그렇게 불렀다)을 앓고 있었다.
사방을 떠돌다가 그 아저씨가 데리고 와서 함께 살게 된 것이었다. 그 부인은 밥도 잘 못하고 반찬도 잘 못했다. 아저씨가 다 해주었다.
아저씨가 바다 일을 나가면 그 부인은 우리 집에 와서 반찬이나 국을 얻어 갔다. 때로는 함께 밥을 먹을 때도 있었고, 자주 우리 집을 찾았다.
어떨 때는 우리 집에 아무도 없는데도 왔다. 시골이라 부엌이 따로 있었는데, 그곳에 가서 혼자 밥을 챙겨 먹거나 반찬을 가져가는 일이 많았다.
큰 형수님이 몇 번이고 말씀하셨다.
"몰래 가져가지 말고 이야기하고 가져가든지, 우리 있을 때 같이 먹든지 해야지." 하지만 그 부인은 말을 잘 듣지 않았다.
세월이 흐르고 그 부인은 임신을 했다.
이란성쌍둥이를 낳았다.
그 시절에는 시골이라서 산부인과 병원이라는 개념이 없었으니 집에서 아이를 낳았다.
우리 어머니께서 두 아이를 받아주셨다고 했다.
아저씨와 부인이 아이를 잘 키울 줄 알았다. 하지만 그 부인은 아이를 낳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나라로 가셨다. 아저씨는 혼자서 아이 둘을 키우게 되었다.
그때부터 우리 어머니께서는 날마다 그 집에 가셨다. 아이들을 씻겨주고 우유도 타주셨다. 그 아이들이 유년 시절,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 우리 집에서 함께 밥을 먹는 날이 많았다.
세월이 흘러 두 남매는 중학교를 서울로 갔다고 했다. 서울에 아저씨의 친척이 있다고 했다. 남자아이는 권투를 했고, 여자아이는 공장에서 일을 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은 성장한 후에도 아버지를 돌보지 않았다. 아저씨는 수십 년 동안 혼자 살다가 결국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 남매들은 더 이상 고향에 오지 않았다.
나는 어릴 때 궁금했다. "왜 정신병에 걸릴까?" 사람들에게 물었다. 그때는 스트레스라는 용어를 쓰지 않던 시절이었다.
사람들은 말했다.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머리가 터진 거야."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 속에서 스트레스를 받을 때 고통이 시작되는 것 같다.
살기 위해 공부하고, 살기 위해 일하고, 살기 위해 이 사회에서 자신이 가진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 세상.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무너진다.
편견 없는 세상은 없다.
하지만 어릴 때 옆집의 그 부인을 대하는 어머니와 큰 형수님의 모습을 보았다.
편견 없이 밥을 나누고,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나 또한 그렇게 자라서 어머니와 형수님처럼 이웃을 돌보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런데 살다 보니 참 힘든 일이 많았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어머니와 큰 형수님이 그 부인과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두 분은 묵묵히 해냈다.
세상에는 따뜻한 일도 많다는 것을 나는 그때 배웠다. 그리고 지금도 그 온기를 잊지 않으려 한다.
편견 없는 밥상. 그것은 단순히 음식을 나누는 것이 아니었다. 한 사람의 존엄을 지켜주는 일이었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50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때의 밥상을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