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졸업 후 딱 한 번 본 얼굴이 마지막이 된 친구
내 어릴 때 시골에는 어려운 사람들이 많았다. 50년 전이라서 그랬을까. 그때는 모두가 그렇게 어렵게 살고 있었다.
내 깨딩이 친구이자 우리 집안 8촌쯤 되는 친척인 친구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우리는 초등학교, 중학교를 함께 다녔다.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그 친구는 고등학교에 가지 않고 서울로 돈을 벌러 갔다.
그 친구는 삼 형제 중 맏이였다. 큰아들, 둘째 아들, 셋째 아들. 나는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갔지만 그 친구는 서울에 가서 재봉 기술을 배웠다. 기술자가 되어 돈을 꽤 벌었다고 했다.
내가 막 대학교를 졸업하고 아직 직장을 구하지 못했을 때였다. 그 친구가 서울에서 재봉 사업을 접고 시골로 내려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버지와 함께 배를 구입해서 고기잡이 사업을 시작했다고 했다.
그 친구의 둘째 동생은 언어,청각장애인이었다. 예전에는 벙어리라고 불렀다. 지금은 농아인, 법적으로는 언어, 청각장애인으로 불리운다.
우리 시골에서 아이들이 그 친구의 둘째를 많이 놀리는 것을 본 기억이 난다.
지금 그랬다면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일이다. 하지만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그런데 불행이 찾아왔다.
어느 날 친구와 아버지가 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러 나갔다. 닻을 내리는 과정에서 닻줄이 친구의 다리에 걸렸다. 친구는 닻과 함께 바다로 빨려 들어갔다. 그렇게 하늘나라로 갔다.
나는 그때 고향에 없었다. 다른 곳에 있었다. 한 달 후에야 그 소식을 알았다. 어머니가 말씀해 주셔서 알았다. 친구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지도 못한 채 마음만 아팠다.
또 다른 불행이 이어졌다. 벙어리라고 놀림받았던 둘째도 세상을 떠났다. 둘째는 고향에 있지 않았고 서울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지만 잘 지내지 못한다고 들었다. 그 둘째도 결국 세상을 떠났다.
그 친구도, 그 친구의 둘째도 아까운 20대에 하늘나라로 갔다. 막내아들은 서울에서 살고 있다고 들었다. 그 부모님은 우리 시골에서 살다가 두 분 모두 하늘나라로 가셨다고 들었다.
친구의 마지막 얼굴을 본 것은 중학교 졸업하고 서울에서 시골로 내려왔을 때 딱 한 번이었다. 그것이 마지막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릴 때는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열심히 살아보려고 노력했는데, 인생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 친구의 가정을 보면 생각한다. 한 가정에 그렇게 많은 시련을 줄 수 있을까?
나는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니면서 하나님께 항상 물었다.
"하나님, 왜 나를 다치게 해서 장애를 입게 했나요?"
그렇게 기도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친구의 가정을 생각하며 또 기도했다.
"왜 그 가정을 어렵게 하셔서 세상의 빛을 보지도 못하게 하셨나요?"
인생은 한 번 태어나서 생이 다하는 날까지 행복이라는 단어 속에서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런데 어떤 사연, 어떤 상황 속에서 인생을 개척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어릴 때는 편견과 차별이 당연했던 시절이었다. 사회적 약자가 놀림받고 소외되는 그런 때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약자에게도 인권이 있고, 존엄이 있다는 것을 안다.
살 만한 세상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오늘도 나는 그 친구가 그립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바다에 빠져 떠나간 친구. 중학교 졸업 후 딱 한 번 본 얼굴이 마지막이 된 친구. 어려운 환경에서도 열심히 살려고 했던 친구. 그 친구와 그의 가족이 겪어야 했던 시련들.
5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생각한다. 그들이 좀 더 나은 세상에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청각장애가 있는 둘째가 놀림받지 않는 세상에서 자랐다면 어땠을까. 가난이 그들의 꿈을 빼앗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답은 없다. 다만 나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약자가 차별받지 않는 세상, 장애가 있어도 존엄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일. 그것이 내가 친구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오늘도 나는 그 친구가 그립다.
중학교 졸업 후 본 마지막 얼굴. 그때 나는 몰랐다. 그것이 영원한 이별이 될 줄. 5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 친구를 기억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좀 더 나은 세상에서 만났다면, 우리는 어떤 어른이 되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