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그림자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한 날이었다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데 빗방울이 커져서
나는 사무실 근처 카페로 몸을 피했다.
문을 열자 커피 향과 젖은 흙냄새가 섞여 들어왔다.
그 안에는 이미 지호가 앉아 있었다.
"서하 씨."
그가 반가운 얼굴로 손을 들어 보였다.
"우연이네요."
"그러게요. 피하려던 비가 같은 시간에 내렸네요."
그는 웃으며 내 앞쪽 의자를 밀어주었다.
테이블 위에는 펼쳐진 노트북과 반쯤 식은
아메리카노가 있었다.
"표지시안 다듬고 있었어요."
그가 화면을 돌려보였다.
책 표지에는 흐릿한 라일락 사진이 있었다.
나는 그걸 보는 순간 잠시 숨이 멈췄다.
"이건 봄 호 특집이라서요.
'기억의 향기'라는 제목이 좋을 것 같아서."
지호의 말이 끝나자
내 마음 어딘가에서 오래된 장면이 스쳤다.
버스 창가, 빛 그리고 그 향기.
나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 좋아요. 딱 그 계절 같아요."
비는 점점 굵어졌다.
자호는 창밖을 보며 말했다.
"이상하죠. 비 오는 날은 꼭 누군가 생각나요."
"맞아요. 나는 봄마다 같은 사람이 떠올라요."
그가 내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그건 좋은 기억이에요?"
"이제는... 그래요. 예전엔 좀 아팠는데."
잠시의 침묵.
그는 컵을 들어 커피를 한모급 마셨다.
그리고 말했다.
"그럼 괜찮네요. 아팠던 기억이 괜찮아지는 건,
결국 잘 지나왔다는 뜻이니까.
그 말에 나는 웃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따뜻함이 있었다.
누군가를 위로하기보다
그저 옆에서 같이 걷는 사람의 말처럼 느껴졌다.
퇴근 무렵, 비가 그쳤다.
우리는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같은 방향이죠?"
지호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리엔 비 냄새가 아직 남아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젖은 도로 위에서 반짝였다.
우리는 우산을 나란히 들고 걸었다.
"비 온 뒤 도로는 항상 예쁘죠."
지호가 말했다.
"응, 반짝이잖아요. 마치 불 꺼진 물 위에 불빛이 떨어진 것처럼."
그가 내 말을 듣고 작게 웃었다.
"서하 씨는 항상 표현이 따뜻하네요."
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냥... 오래전부터 습관처럼 생각을 적다 보니까요."
그럼 다음엔 그 생각을 글로 보여주세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 신호등이 바뀌자 먼저 걸음을 옮겼다.
빗물이 튀어 그의 신발에 닿았다.
햇빛이 막 구름 사이로 새어 나오며 그의 어깨 위에 얇은 빛이 내려앉았다.
나는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조용히 따라 걸었다.
창문에 비친 우리 둘의 그림자가 나란히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 그림자들이 마치 서로를 닮은 듯했다.
서로 다른 방향에서 왔는데, 이제는 같은 길 위에서 같은 빛을 받는
사람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