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나이의 옷을 입지 않는다.
세월이 흘러 눈가에 바람이 스며도,
가슴속엔 아직 꽃피던 봄이 산다.
주름은 세월의 서명이요, 흰머리는 인생의 별빛이다.
그 별빛 아래에서도 사랑은 여전히 자란다.
지천명을 지난 남자와 불혹을 지난 여인에게 찾아온 감정이라 해도,
그건 늦게 핀 꽃이 아니라 오래 기다리던 햇살의 귀환이었다.
젊은 날의 사랑이 불꽃이라면,
이 나이의 사랑은 재 속에서도 은은히 타오르는 향로였다.
한때는 불길이 하늘을 태웠지만,
지금은 잿빛 속에서도 향기를 피운다.
그 불씨는 육체의 열기보다 마음의 온도로 이어졌고, 우리는 서로의 결핍을 알아보는 눈빛 하나로
긴 세월의 침묵을 덮었다.
삶이란 결국 외로움과의 화해였다.
남자는 낮에는 가장으로, 밤에는 아버지로, 여자는 낮에는 주부로, 밤에는 어머니로 살아왔다.
그리하여 서로 다른 이름으로 세상을 견뎌냈지만, 그 속에도 메워지지 않는 빈자리가 있었다.
그 빈자리는 바람이 스쳐가는 창문처럼 서늘했으나, 우리는 그 틈을 부끄러움이 아닌 이해로 메웠다.
그 마음은 불순이 아니라,
세월의 바닥에서 건져 올린 따뜻한 체온이었다.
누군가는 이 사랑을 금기로 부를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것은 일탈이 아니라, 잃어버린 자신을 되찾는 순례였다.
그 만남은 바람처럼 스쳤으되,
그 바람이 남긴 향기는 오래도록 가슴에 머물렀다.
시간은 우리를 늙게 했지만,
그리움만은 결코 늙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지 못하면,
보상이라도 받듯 사랑을 갈구하게 된다.
결핍은 그리움을 낳고, 그리움은 발걸음을 부른다.
그래서 사랑은 정지된 감정이 아니라,
언제나 움직이는 생명과도 같다.
요즘 말로 하자면, 사랑은 묶이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것이다.
사랑은 강물처럼 흘러야 한다.
강물이 멈추면 썩듯, 사랑이 멈추면 시든다. 한 번의 만남이 끝이라 해도,
그 물결은 마음속 바다로 스며드는 법이다.
사랑이란 본디 머무는 것이 아니라,
스치며 흔적을 남기는 일일지도 모른다.
사랑이 꼭 젊어야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그리고 꼭 부부의 이름으로 묶여야 진실이 되는 것도 아니다.
무조건적인 희생이나 순종이 아닌, 서로의 마음을 존중하며 이어지는 한결같은 사랑도 있다.
때로는 정절이라 불릴 만큼 순하고,
때로는 순애보처럼 세속을 넘어선 사랑도 있다.
그런 사랑은 불꽃이 아니라,
긴 세월에도 꺼지지 않는 등불의 심지와 같다.
세상은 법으로 사람을 재단하지만,
마음은 언제나 그 법 바깥에서 피어난다. 도덕의 잣대는 차갑지만,
사랑의 불씨는 언제나 따뜻하다.
우리가 택한 길이 누군가의 눈에 허물이라 해도, 그 속에 깃든 온기만큼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러니 불륜이라 일컫지 마라.
이것은 탐욕의 그림자가 아니라,
고요한 외로움이 부른 메아리다.
죄보다 먼저 있었던 건 그리움이었고,
그리움보다 먼저 있었던 건
서로의 마음을 알아보는 인간의 눈빛이었다.
내가 그녀를 만난 것은 계절의 여왕이라 불리는 오월, 장미가 피던 날이었다.
햇살은 유리창 위에 흩어진 금가루처럼 부서지고, 바람에는 막 피어난 꽃잎의 숨결이 섞여 있었다.
우리는 글과 목소리로 서로의 마음을 나누며, 보이지 않는 온기로 사랑을 키워왔다.
얼굴 한 번 마주하지 않았음에도
사진 속 그녀의 미소 하나에 마음이 저려왔다.
마치 영화(접속)처럼,
채팅 속 글자들이 사랑의 온도를 품고
밤마다 우리의 심장을 두드렸다.
보고 싶다는 말이 밤낮없이 채팅창에 남았고, 그 말은, 행진만 거듭하던
우리 사랑의 첫 말문이었다.
그리움은 그렇게 하나의 계절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천 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서울로 왔다.
그리움이 곧 발걸음이 되었고,
그 발걸음은 내 초대 한마디에
주저함도, 두려움도 없었고,
오직 서로를 갈구하는 뜨거움만이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이 만남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기다려온 운명 같은 인연일 것 같았다.
용산역의 인파 속에서 처음 그녀를 보았다.
사진으로만 보던 청순함이
현실의 공기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피어났다.
수줍은 듯 미소 짓던 그녀의 얼굴은
햇살 한 줌을 품은 듯 눈부셨고,
그 미소는 내 마음속 오래된 겨울을 녹였다.
그녀를 보는 순간,
나는 봄날의 첫 나비를 본 소년처럼 가슴이 어수선하게 떨렸다.
그녀와 단둘이 마주 앉아 먹는 밥맛엔
꿀보다 더 달콤한 설렘이 배어 있었다.
우리는 명동 거리를 걸었다.
그녀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자연스럽게 손을 잡았다.
그 손끝의 온기가 마치 오랜 세월 잃었던 청춘의 숨결처럼 다가왔다.
사람의 물결 사이로 우리 둘만의 시간이 흘렀고, 붉은 간판과 바람 속 항수 냄새, 스피커에서 흐르던 낡은 팝송까지도 그날은 모두 우리 사랑의 배경음이 되었다.
그녀와 함께한 식사 후 우리는 청계천을 걸었다.
그녀가 내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팔짱을 낄 때, 내 안의 오래된 소년이 깨어났다.
도심의 소음은 물결에 씻겨나가고,
발끝 아래로 잉어가 꼬리를 흔들며 지나갔다.
한 쌍의 청둥오리가 나란히 헤엄쳤고,
그 물 위에 비친 우리의 그림자 또한
한 몸처럼 붙어 흘러갔다.
버드나무 잎사귀가 바람에 흔들리며 떨어져 물결 위에서 천천히 떠내려갔다.
그때 나는 문득 생각했다.
이 풍경은 어쩌면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세상에 때 한 점 묻지 않은,
마냥 티 없이 맑고 여린 소녀 같았다.
신은 흙으로 인간을 만들었다면,
그녀는 바람과 햇살로 빚어놓은 여인이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햇살이 장난치듯 내려앉았고,
그 웃음 속엔 세상 모든 봄이 피어 있었다.
재잘거리는 말놀림에 나는 어느새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그녀는 너무도 귀엽고 천진하여
때로는 어린 소녀 같기도 했고,
또 한순간 청순한 여인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우리는 달콤한 말을,
그리고 가슴에 둔 말을, 감춰둔 말을
하나씩 꺼내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렇게 우린 마치 오래된 연인처럼 자연스러웠다.
해가 서쪽 하늘로 기울기 시작하자
도심의 불빛이 물 위로 반짝이며 피어올랐다.
그 빛 사이로 그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햇살도, 바람도, 그날의 하늘도 모두 우리를 위해 잠시 머문 듯했다.
그날 저녁, 우리는 마침내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
긴 침묵 끝에 마주한 한마디 “사랑해”는 세월의 벽을 녹이는 불씨가 되어
우리 사이의 거리를 태워버렸다.
그 순간 바람도 숨을 죽였고,
세상은 오직 우리 둘만의 온기로 가득했다.
심장은 같은 박동으로 뛰었고,
그 뜨거운 떨림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하나가 되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가끔씩 다시 만났다.
서울과 그녀의 고향을 오가는 길은 멀었지만, 그 거리가 오히려 그리움을 더 깊게 만들었다.
기차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마다 그녀의 얼굴이 비쳤고, 창문에 맺힌 이슬방울 하나에도 그리움이 머물렀다.
만남은 짧고, 기다림은 길었다.
그러나 그 기다림마저도 행복이었다.
서로를 보고 싶은 마음 하나로 우리는 길을 달렸고, 그 길 위에서 또 다른 계절을 맞았다.
세월은 흘러, 그때의 우리는 서로 다른 길 위에 섰다.
삶은 제 갈래로 흘러갔고, 서로의 안부조차 묻지 못한 채 시간만이 우리 사이를 조용히 가로질렀다.
그러나 문득 바람이 스칠 때면
그녀의 미소가 다시 떠오른다.
봄날의 햇살처럼 눈부시고,
또 한편으로는 잎새 끝에 맺힌 이슬처럼 아련하다.
이제는 이름조차 부르기 망설여지는 그 사람, 하지만 내 마음 한편엔 아직도
소녀 같은 그녀가 산다.
귀엽고 예뻤던 그 시절 그대로.
그 웃음, 그 눈빛, 그 재잘거림까지도
아직도 내 가슴 어딘가에서 조용히 살아 있다.
비록 예정된 이별의 수순이었을지라도, 우리의 사랑 또한 아름다웠다.
한때 서로의 계절이 되어주었던 그 시간, 그 봄날의 향기는 지금도 내 마음속에 피어 있다.
사랑은 떠났지만, 그 온기는 아직 봄빛처럼 남아 있다.
사랑은 때로 희생과 순종의 옷을 입고 나타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를 위해 자신을 버리는 데 있지 않고, 서로의 존재를 온전히 이해하고 존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사랑이란 결국 함께 있음의 완성이지,
한쪽의 헌신만으로 지탱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 빛바래면 정절도 흔들리고,
일편단심도 무너진다.
그러나 그것이 변심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감정의 유한함이자 삶의 진실이다.
사랑은 영원히 같은 모양으로 머무르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가 나눈 그 사랑 또한
변했다 해서 더럽혀진 것이 아니라,
한 시대를 지나며 서로를 비춘
한 줄기 빛의 궤적이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사랑이며,
불륜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이유다.
그것은 죄가 아니라,
삶이 허락한 마지막 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