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유의어

by 도도히

2. 노부부의 부정교합


오래된 TV 프로그램이었다. 농촌의 특산품소개도 하고 여러 가지 게임을 하며 농촌을 살리자는 홍보 프로그램으로 기억된다.

노인 부부의 합이 얼마나 맞는지 알아보는 게임이었다.


할아버지가 설명을 하면, 할머니가 맞추는 게임이었다. 대체로 합이 잘 맞는다 싶은 순간

"으음 저기 있자너, 우리, 우리 관계를 뭐라고 하지?"

할아버지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할머니는

"웬수"

"아니, 그거말고 넉자로 다른 말로 말혀봐아 ...."

할아버지는 애가 탓지만, 할머니는 자신있게 외친다.

"평ㆍ생ㆍ웬ㆍ수"

답은 '천생연분'이었다.

그들의 첫 만남은 우연이었다. 모르는 남자가 여자의 신상을 훤히 꿰차고 있다니 한번은 만나야할 것 같아서 나갔다.


처음인데 남자가 구면인양 편하게 느껴졌다. 고향사람이라는 것이 절반은 먹고 들어간 것일까.

남자의 얼굴은 길었고, 생긴 편은 아니었으나 부드럽고 선량한 인상이 나쁘진 않았다. 웃을 때면 작은 눈을 완전히 감고 웃는 모습이 밝고 시원했다. 고르고 하얀 치열이 인상적이었다.


"근데 절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그게 제 친구의 또 친구를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같은 도시에 있으니 한번 만나보라는 말에 별 생각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한번 봐야지 했지요." 그게 그들의 첫 만남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인연이란 묘한 것이다. 도저히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인연이 되려면 세상끝에서라도 만나지는 것이다. 비혼을 고집하던 한 친구는 혼자 스페인 여행을 하다가 역시 혼자 여행 중인 남편을 만났다. 그럴 때 신이 있다는 것을 믿고 싶어진다.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부가 된다는 건 사람의 힘만은 아니다. 분명 헤라가 개입된 운명이나, 팔자소관이다. 함께 살면서 산전수전 겪으며, 고비마다 '대체 어쩌자고 이런 남자를, 여자를 만났을까' 곰곰 되짚어보게 된다.


남자를 만나려고 좋은 혼사를 거절하고, 몇 번의 우연한 만남도 엇나갔나 보다. 연분은 따로 있었으니. 철없이 연애할 때라면 모를까, 혼기를 놓친 중년들이 결혼을 전제로 만나다보면 이것저것 쉽지 않다. 그간 혼자 살아온 패턴이 편하고, 새로운 게 귀찮은 것이다.


같은 사무실에 제일 나이 많은 왕 언니가 그랬다.

"얘들아 따지긴 뭘 따지냐, 살다보면 다 그놈이 그놈이여. 왠만하면 그냥 맞추며 살어. 바지만 입었으면 됐어. 니네 나이가 몇이냐." 라며 만날 때마다 후배들에게 결혼을 독려했다. 그때만 해도 서른 안팎이면 골드미스였다. 또한 유난히 그녀의 개발부서에만 미혼이 많았다.

그녀의 성격은 좋다면 좋고, 좀 허술하다고나 할까? 뭐든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이 때론 구멍이었다. 결혼 상대도 그다지 진지하게 생각지 않았다. '태어나면서부터 꼬인 인생, 뭘 따지나.' 그녀야말로 조건이라면 딱 두어가지를 생각했다. 자기를 보완해 줄 요소가 있다면 그게 전부였다.


그녀는 안경을 썼다. 얼굴은 동글동글하다. 키가 아담한 편이다.


그래서 남자의 조건은 첫째, 안경을 안 낄 것, 둘째, 얼굴이 길어야 할 것, 셋째, 남자 평균 중키 이상.

남편은 이런 조건에 딱 들어맞았다. 그녀의 속 마음을 아는 누군가가 준비해 둔 맞춤형이었다.


하지만 사실 이 남자와 평생을 함께 해야겠다고 생각한 데는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서로 탐색하며 만나던, 어느 날이었다. 막 헤어지려는 순간에 그는 순하게 한 마디를 뱉었다.

"사실 전, 알면 알수록 부족함이 많은 사람입니다."

콩까풀이 씌었는지, 덩치 큰 남자가 진심으로 말하니, 사랑한다는 고백처럼 들렸다. 그 순간 그를 안으로 들였다고나 할까. 그녀는 그의 순박하고 겸손한 모습에 감동을 했다. 그 동안 만났던 누구와도 결이 다른 남자였다.


'별로 가진 것도 없고, 그다지 잘난 것도 아닌 것들이 더 있는 척, 잘난 척, 온갖 유세를 다 떨더구먼, 이 남자야말로 참 솔직하고 겸손하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후로 더욱 그가 좋아졌고 신뢰가 갔다. 그의 허술한 매력에 푹 빠졌다. 노바디! 노바디! 버츄였다.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여름에 만나서 사귀다가, 가을에 프러포즈를 받고, 겨울에 결혼을 했다. 절친이 한 마디 했다.

"넌 어쩜 그리 욕심이 없니?"

살아갈수록 그와 많은 것들이 맞았다. 그녀가 대충하는 성격이라면, 그역시 야무진 데라곤 한 군데도 없었다. 그저 싱거운 사람이었다. 모아둔 것도 없었지만, 앞으로의 계획도 별반 없어 보였다. 그냥 좋은 게 좋은 그런 인간. 평생 누구와 다툴 일이 없을 것 같은 법 없이도 살 사람. 맹한 것이 매력인 남자였다.


회사가 어려웠던 때다. 몇 달동안 임금이 체불되고, 밤 늦게 파죽이 되어서 귀가를 하곤 했다. 하루는

"나 참, 기가 막혀서...."

옷을 갈아입으며 말을 하다말고 혀를 찼다.

"왜, 또 무슨 일이 있어요?"

"아니, 회사가 어려운 줄 알면서....서로 전력을 다해 도와도 될까말까 한데, 하던 일 팽개치고, 퇴직금 받아서 빠져 나간다는 게 말이 되나?"

중책을 맡은 간부가 또 그만 둔 모양이다.


제 때 생활비도 못 가져 오면서, 부쩍 퇴근 시간이 늦도록 그로기 상태로 귀가하는 남편이 안돼 보였다. 그의 눈치만 보면서 지내던 긴장의 나날이었다. 그래도 속으론 뿌듯했다.

'그럼 그렇지. 내가 사람 하나는 잘 만났어. 회사가 어려울수록 자기 잇속을 챙겨 나가기보다, 약간의 희생을 하면서라도 회사를 일으키려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진짜지. 이런 사원 한둘만 있어도 곧 회사는 곧 일어설거야.'

그런 남편이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얼마후 회사는 무너졌다. 주식회사 간부였던 남편은 연대 책임을 져야했고, 그날부로 백수가 되었다.


아직 아이들은 어리고 한창 이것저것 챙겨야 할 것들이 많고 사교육비도 만만치 않았다. 하나님은 한쪽 문을 닫으실 때는 다른 창문이라도 열어두신다 했던가. 그녀만이라도 직장이 있다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녀는 매사 낙천적이다. 남자의 파산으로 빚더미에 나 앉았으나, 빚을 갚는 것도 저축이라 생각하며 꾸덕꾸덕 살아간다. 이 부부는 천생연분, 나사가 두어 개쯤 빠진 것이 꼭 닮았다. 매사에 구멍이 많다. 서로 닮은 꼴이다.


다 지난 일이다. 아이들은 저절로 커서, 어려운 관문을 뚫고 제각기 직장생활을 한다. 앞이 안 보일 때가 있었지만 모든 것은 지나가게 되어 있다. 심신이 건강하면 하늘이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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