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by 민서

나는 바람을 안고 싶었다. 변화무쌍하게 공기를 유영하며 만물을 스치는 흐름을 사랑했다. 그 소망을 위해 너른 들판에 서 두 팔을 벌리고 바람을 불렀으나, 선풍은 나를 놀리듯 입바른 대꾸 한 번 들려주지 않은 채 번번이 나를 지나쳐 애꿎은 금빛 이삭들을 희롱했다. 그래서 나는 돌풍을 안기로 했다. 나를 스치고 흘러갈 다정한 바람보다야 추한 흉을 남기더라도 확실히 닿을 돌풍이 나았다. 수십 년의 노고를 버틴 나무들이 빽빽이 자리한 숲 가지가 얼기설기 엮인 빈틈에 섰다. 어느덧 해를 가린 넓적한 이파리를 타고 차가운 물방울들이 미끄러지기 시작하며 먹을 삼킨 듯 짙은 구름은 악을 썼다. 나무들이 맞잡은 손 새로 부는 사잇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쳤다. 뱀이 혀를 날름거리듯 예리하게 벼린 검을 내리듯 쉭쉭거리는 소리가 귓바퀴를 때렸다. 곧 좁은 구멍 사이로 바람이 쏟아지는 파도처럼 한순간에 밀려 들어왔고, 나는 돌풍을 안아 환대할 생각으로 가슴을 열며 눈을 감았다. 그러나 코끝에 맴도는 것은 녹진하게 가라앉아 진흙과 덩어리 진 빗방울의 향기가 아닌, 날카로운 자상의 통각이었다. 돌풍은 나의 옷자락을 찢고 안을 비집고 들어와 조각조각 헤집어 둔 것은 물론 곁 나무의 팔을 꺾어 마구 던져 댔다. 무디고 잔혹한 그 손길에 질려 버린 나머지 나는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그런 나를 비웃듯 여전히 날서게 휘몰아치는 돌풍을 뒤로하고 숲을 벗어났다. 그 신랄하고 매서운 양은 마치 검무와도 같아 살결에 가느다란 실금을 수도 없이 남겼더랬다. 공기의 흐름이 곧 바람, 바람이 곧 공기. 유유상종이라 했던가, 바람이 남긴 상처는 공기에만 닿아도 화끈거려 통 얼얼했다. 무거운 걸음을 비척비척 옮겨 다다른 곳은 어느 언덕 위였으매 싱그러운 잔디와 들꽃 몇 송이를 제하면 볼 것도 없는 무심한 둔덕이었다. 나무 등치에 기대어 잠시 숨을 돌리고 지친 몸을 누이던 찰나 누군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다름 아닌 미풍, 산들바람이었다. 낙엽 몇 가지를 머금고 존재를 뽐내며 다가온 그는 상냥한 손길을 내밀어 제 품으로 오라 물었다. 그러나 기껏해야 머리칼 몇 가닥 흩트리고 들국화 꽃잎이나 살랑이는 약하디 약한 간지러운 바람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싶어 눈길조차 주지 않으며 되었다 했다. 선풍도 돌풍도 조소를 지으며 지나가는데 한낱 산들바람이 나서 봤자지, 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속눈썹이 나붓거리는 것이 느껴져 살며시 무거운 눈꺼풀을 들고 보니 지치지도 않은 미풍이 나를 간질이고 있었다. 깃털처럼 가볍고 섬세한 스침이 돌풍의 상처를 쓸었고, 그는 놀라우리만치 부드럽고 또 다정했다. 처음 달고 온 낙엽 몇 뭉치가 의기양양하게 나부끼는 모습이 퍽 사랑스러워 웃음을 흘렸다. 나의 오만을 반성하며 다시금 눈을 감자 미풍은 신난 듯 귓가부터 목덜미 그 아래 쇄골까지 샅샅이 훑으며 맨 살갗을 닿았다. 무게감이라고는 없는 말랑한 그 손길에 몸을 맡기고 있자니, 어느 순간 나는 바람의 품에 들어와 있었다. 그토록 소망했던 바람은 가장 먼저 뺨이 간지러웠고, 그다음으로는 구순이 아릿했으며, 마지막은 아스라한 향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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