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랭이꽃

by 민서

나는 한 떨기 들꽃이다. 연한 자주색 꽃잎 위로 희끄무레한 얼룩이 번진 보잘것없는 꽃이다. 산발해 무더기로 수풀져 피어 있는 모습은 나름대로 그 묘미가 있다고 해 줄 만하나, 나는 겨울을 지나면 대개 지쳐 스러지고 만다. 그리하여 자애롭고 온화한 초봄의 품에서는 차마 만개하지 못하고 여름이 눈을 뜰 때, 그제야 게슴츠레한 눈을 비비며 깨어난다. 오뉴월 초여름 여름이 미처 백일몽을 다 떨치지 못하고 나른해 있는 탓에 바람은 나무에 애처로이 매달린 이파리를 희롱하듯 선선하고 일광은 대지를 애무하듯 야틋하기 그지없다. 부드러운 손길에 가시덤불 속 몸을 숨기고 있던 붉은 여왕은 천천히 혀를 내밀고, 꽃의 제왕이라던 모란은 한 발 물러서 그 마지막 행보마저 우아하다. 작약 역시 흐드러지게 피어 재상의 입지를 과시한다. 꽃다운 꽃들이 한껏 모여 잎자락을 넘실거리고 샛노란 속을 드러내어 제 것을 취하라 손짓한다. 그 화용에 홀린 남풍이 호젓한 기색을 내보이며 여름의 열기를 살풋 머금어 요사스러운 손길을 뻗자, 간지러운 유촉에 화류는 몸을 움츠리는 척 나붓나붓 흔들어 댄다. 달큰하고 녹진한 향기가 온 대기를 삼켜 저로 물들이자 광활한 세상마저 화영 아래에 있는 듯하다. 그러나 꽃의 제왕들께서 저고리를 곱게 갖춰 입고 옷고름 속에 숨긴 사향을 펄럭펄럭 은근하게 내보일 동안에도 일개 들꽃은 시선조차 들지 못한다. 접시꽃은 늘씬한 줄기를 뽐내며 하늘을 내려다보고, 울긋불긋한 꽃들 사이 푸르른 색채를 자랑하는 수국도 덤불을 지르밟고 꼭대기에 만발한다. 그러나 나는 어떠한가. 화신들이 여름을 머금어 한층 더 진해진 색채를 자랑함에도 불구 내리쬐는 태양에 약이 올라 쓰디쓴 진녹색일 뿐 꽃잎은 자색 바탕에 흰 띠를 얽맨 이도 저도 아닌 모양새다. 차라리 겨울에 피었다면 흰 눈 사이에서 연지색 가냘픈 몸뚱어리가 눈에 띄기라도 할까, 라는 생각을 하던 것도 찰나였다. 그 이유를 묻는다면, 내 줄기는 곱게 말하면 가냘프고 벼리어 말하면 비실거리는, 손톱으로 짓누르기만 해도 초즙을 토해낼 연약하기 짝이 없는 한 가닥 선율에 그치기 때문이다. 시린 겨울의 입바람 한 번이면 빈약한 줄기는 야트막한 교성 한 번 없이 꺾일 것이고, 꽃잎 가장자리의 요철 한 마디마다 새하얀 눈송이가 내려앉아 나를 갉아먹을 것이기에. 그렇다고 초봄에 눈을 뜨자니 겨울이 한바탕 휩쓴 대지의 잔존이 척추를 타고 흘러 꽃 피우기엔 턱없이 모자란 기력만을 남긴다. 한때는 고독한 가을의 한품에 안기려고도 해 보았으나 가을은 오색찬란한 낙엽의 바다에서 고즈넉한 산보를 즐기고 있더기에 차마 말도 꺼내지 못했다. 초여름이 느릿하게 눈을 뜨고 축축한 숨결을 내뱉으면 입하가 손을 흔들고 봄비와 곡우에 안녕을 고한다. 어제까지만 해도 토양을 촉촉이 식혔던 여우비는 그사이 원한이 하나 더 늘었던지 한결 거세져 소낙비가 되고, 막 엄동설한을 돌려보내 얼어붙은 벌판을 쓰다듬던 다정한 햇살은 뙤약볕이 되어 제 몸을 부수고 그 파편을 초원에 쏟아붓고 있다. 가장 위에 고고히 서서 가장 깨끗한 이슬을 가장 먼저 받아 마시는 화태를 부러운 듯 올려다보고 있자면 자애로운 여왕들은 날카로운 이파리 위로 이슬 한 닢을 굴려 내려보내 준다. 그 방울로 메마른 입술을 축이고 초라한 꽃술을 닦는다. 단장하는 화영에 가려 한 톨 구멍이라도 찾으려 아등바등 고개를 기울이다 보면 일광욕을 충분히 즐긴 풍만한 자태들이 미모사의 행보를 따르듯 점차 웅크린다. 그 사이를 틈타 태양이 흩뿌린 자그마한 볕의 파편을 삼키어 미미한 생을 잇는다. 비록 이리 넝쿨을 빌빌 기며 살아가는 비좁은 속의 들꽃이라도, 추적추적 빗방울조차 정처 없이 흩어지는 희끄무레한 미시 경 타박타박 작은 발걸음에 귀를 기울인다. 연갈색 머리칼을 곱게 땋은 새첩은 여자아이 하나가 홍연 색 치맛자락을 나부끼며 총총히 다가와, 무엇이 그리도 궁금한 것이 많은지 깊은 고동색 눈을 도록도록 굴린다. 이끼 낀 하엽색 연석을 빤히 들여다보는 눈길에 몸이 비비 꼬이는 듯 간지러운 기분이다. 통통히 세상의 손때 묻지 않은 고사리손이 살며시 뻗어오기에 가냘픈 줄기 오늘에서야 꺾이나 싶어 갈대 같은 마음 다잡고 눈을 감았으나, 여린 줄기를 짓누르는 억센 손길은커녕 꽃잎을 조심스럽게 쓸어 보는 다정한 움직임에 다만 어리둥절할 뿐이다. 제 키보다도 높은 듯한, 자색 영산홍이 흐드러지게 지고 남아 우거진 수풀 아래 조촐하게 피어난 나를 어찌 찾았는지 세심히 눈을 맞춰오는 모습에 작달막한 들꽃의 속도 설렘으로 가득 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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