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하니 해안을 거닐었다. 머릿속을 유영하는 —유영보다는 한층 거친 표현, 이를테면 마구 떠올라서 시냅스 교집을 헤집어 놓는다든가 하는 표현이 좀 더 어울릴 것 같다. — 수많은 잡념들을 켜켜이 쌓아 서랍 속에 조심스럽게 개켜 넣듯이 하나하나 담았다. 아스라한 태양이 덥혀 둔 미색 모래 알갱이가 주름진 맨발 사이로 스며 왔다. 늦여름 혹은 초가을의 모호하고 미적지근한 열기가 고독한 상심을 보듬었다. 새하얀 포말은 부서지듯 다가왔지만 끝내 닿지 못하고 발치에서 무너지는 것에 그쳤다. 수면 위로 드러난 암초는 왜 그 자리에 굳건히 버티고 서 있는지 직접 보여 주기라도 하듯 매서운 풍파에도 미동조차 없이 의연했다. 저 바위처럼 견실해야 할 것은 나이고, 파도처럼 미련 없이 떠내려 보내야 할 것은 추적추적 해묵은 잔상인데, 정작 실상은 그 반대에 지나지 않았다. 뿌리를 곱게 내려 정박했던 귀처를 잃은 진녹색 해초 줄거리가 파도에 휩쓸려 을씨년스러운 광경을 빚어냈다. 그 옆 덩달아 너울너울 해풍에 치이는 갈파래 덩어리도 썩 보기 좋은 꼴은 아니었다. 철썩, 파도가 한 번 더 해안에 부딪쳤다. 자꾸만 치근덕거리는 파도가 성가셨던지 해식암은 제게 매달린 미물들 중 몇 손을 떨쳐 버렸다. 따개비와 고둥···. 그리고 한낱 미물에 의지하는 더한 미물들까지. 파도의 매몰찬 발톱에 말려 잔영 하나 남기지 못하고 점점이 사라졌다. 그 모습에 괜스레 마음이 동해 기암 사이로 발을 디뎠다. 맨 살갗을 시리게 할퀴자 절로 곱아드는 발가락, 물방울 하나 튀지 않았음에도 덩달아 오그라드는 손끝. 흰 원피스 끝자락이 나부끼다 바닷물을 머금어 한결 짙어졌지만, 아무렴 좋았다. 차가운 천이 발목을 휘감는 감촉이 마치 누군가 턱, 하고 물속에서 저를 붙잡는 것만 같아 뒷목이 으시시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수평선에 뻗고 싶단 남모를 열망을 품고 한 발, 한 발 떼다 보니 어느덧 허벅지까지 잠겨 있었다. 조금 큰 파도가 치노라면 잽싸게 허리를 낚아챘고, 작은 파도는 아쉬운 듯 둔부에서 어슬렁댔다. 어느덧 냉랭하던 수온이 미지근하게 느껴질 즈음, 달리 큰 파도가 헤쳐 와 가슴을 찔렀다. 아직 그 서늘함에 차마 적응치 못한 상체가 제 나름대로 비명을 지르는 마냥 바짝 굳어 경련했다. 벌새라도 된 듯 파닥이는 심장을 꺼내 두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얼음으로 된 돌기가 잔뜩 돋아 있겠다 싶을 정도로 아찔했다. 새삼스럽게 놀라워 화들짝 뒷걸음질 쳤다. 해안에 닿기 전 중턱의 암석 하나가 눈에 띄었고, 공기에 몸을 내놓기에는 마뜩잖았기에 냉큼 엉덩이를 붙였다. 물에 잠긴 하체는 오히려 미적지근한 해류가 간지러웠고, 햇빛으로 덥힌 공기임에도 그 발길이 닿는 허리 위는 아리도록 싸늘했다. 긴 머리칼 끝이 소금기 어린 바닷물을 핥기라도 했는지 잔뜩 뭉쳐 있었고, 원피스 단은 물결에 의지를 내맡기고 정처 없이 너울거리고 있었다. 바다는 만물의 영장이라던가, 모든 생명은 바다로부터 왔다던가 하는 시답잖은 생각을 떠올리고 있자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잠시라도 다른 것으로 주의를 돌릴 수 있었던 탓이 아닐까. 짤막한 숨을 뱉으며 창해에 안녕을 고했다. 좀 전까지 냉수를 마시던 발은 모래가 무심하게 내어 주는 온기에도 반색하며 기껍게 삼키려 들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바람은 나를 바다로 다시 밀어내려 들며 피부를 스칠 때마다 막 틔운 온기마저 앗아갔다. 바람은 포근히 나를 안던 물방울들을 잡아챘고, 그들은 환송의 대가로 온기를 한 움큼씩 챙겨 갔다. 점차 체온이 식으며 이가 떨렸고, 몸이 떨렸다. 근육이 당장 열기를 내놓으라 귓불을 당기며 아우성치는 것만 같았는데, 그 감각이 퍽 반가웠다. 다른 곳으로 감상이 쏠릴 틈이 없었달까. 한결 편안해진 마음은 복잡한 심경도 제치고 빠른 결정을 도왔다. 닻을 내릴 곳을 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던 아까와 달리, 명확한 길이 보였다. 천천히, 몸을 돌렸다. 육풍도 나를 응원하듯 조용히 미끄러져 등을 떠밀었다. 다시금 해수가 다리를 물었지만, 아까처럼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감읍할 따름이었다. 예리하게 벼려진 바람이 피부를 베었다면, 물은 그 위를 부드럽게 보듬었다. 출렁이는 바닷물이 따뜻하게 느껴질 때까지, 꾸역꾸역 몸을 밀어 넣었다. 이윽고 짭찔한 물방울의 군집은 뾰족하게 내 눈을 찔러 왔고, 염류가 폐부 깊숙이까지 쾌청한 맑음을 채웠다. 나는 눈을 감았고, 그 청아함이 온몸을 침식하도록 허락했다. 투명함의 무게가 나의 육신에 얹혔고,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때 묻은 육체도, 해묵은 기억도, 피로한 정신도 모두 심해에 묻었다. 바다는 탈진한 제 아해가 순순히 품으로 돌아오도록 허했으며, 그 부산물 역시 짙은 해저에 감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