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 시대의 인문학
종이, 비닐, 페트병. 종이, 비닐, 페트병.
어딘가 주문과도 같은 쓰레기의 이름들을 외우며 땡볕 아래에서 쓰레기를 분류 배출한다. 한여름 낮의 비닐과 페트병은 무슨 귀중한 보석이라도 되는 것 마냥 햇볕 아래 반짝인다. 이 반짝이는 것들이 태평양 한가운데에서는 수평선을 가득 메울 정도의 쓰레기 섬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니 잠시 섬뜩해진다. 그러나 섬뜩함은 잠시, 더위가 몰려오자 다시 주문과도 같은 분류 배출을 이어간다.
종이, 비닐, 페트병. 종이, 비닐... 비닐 종이?
잠시 멍하니 내 주문을 깨뜨린 대상을 내려다본다. 다 쓴 공책에서 나온 비닐 코팅된 종이 묶음이다. 비닐이라고 하기에는 충실히 종이의 역할을 수행해왔으나, 종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매끈하고 윤기가 나는 무언가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사물의 특성은 본질을 앞설 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사용하는 대다수의 합성어에서 사물의 본질은 특성의 뒤에 온다. 딸기 우유는 딸기보다는 우유에 가깝고, 방탄소년단 역시 방탄들이 아닌 소년들로 불리는 것이 더 적합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비닐 종이의 본질은 철학적으로 보건대 종이일 것이다.
과연 비닐 종이는 비닐이기 이전에 종이인가? 그 이전에, '종이'라는 항목에 본질을 논할 수 있을 만큼의 일관성이 존재하는가? 애초에, 분리수거의 항목이 한 물질의 존재론적인 현실을 반영하기는 하는가? 머리가 아파온다.
답도 없는 철학적인 고찰은 뒤로 해둔 채, 주머니 속의 핸드폰을 꺼낸다. 그렇게 초록 검색창을 켠다. 생각해보면 학부 시절의 과제도 항상 비슷한 방식으로 귀결되곤 했다. 문제의 발생, 인문학적인 고찰의 연속, 그리고 포기 선언과 동반된 인터넷 서핑. 잠시 옛날 생각에 빠진 채 엄지를 이용해 검색한다.
"비닐 종이 분리배출 어떻게 하나요..."
대답이 돌아온다.
"비닐 코팅된 종이는 비닐류로 분리 배출하면 됩니다."
그렇다. 철학은 패배했다. 그것도 분리수거에게 말이다.
철학과 친구들에게 던져줄 또 다른 농담거리를 발견한 나는 음흉하게 낄낄대면서 분리수거를 마무리한다. 내 눈 앞에는 온갖 종류의 쓰레기들이 컨테이너 박스 안에 일사불란하게 도열해 있다. 종이면 종이, 페트병이면 페트병, 우유곽이면 우유곽대로 다 각자만의 박스 안에 모여 있다.
분리수거의 정치학
농담처럼 시작한 잡념이지만, 앞에 놓여 있는 쓰레기들을 보고 있으니 생각에 잠긴다. 흔히 기후위기와 관련된 정치적 이야기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말이 있다. 바로 쓸데없이 선동하지 말고 "분리수거나 잘 하라"는 이야기다. 물론, 쓰레기 분리배출과 재활용은 상당히 중요한 과제이기에 이 말을 직접 반박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한국의 생활폐기물 재활용률은 공식적으로는 항상 높은 수치를 기록해왔다. 이 통계는 수거된 폐기물 중 재활용 선별 업체에 넘겨진 비율을 계산하는 방식으로 정해진다.
그러나, 실제로 선별 업체에 넘어간 쓰레기 중 몇 퍼센트가 실질적으로 재활용이 되는지는 추산이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그나마 추산된 값 역시 그리 낙관적이게 보긴 힘들다. 한국일보가 취재한 선별업체에 의하면 선별 단계에서 35퍼센트 이상의 플라스틱 쓰레기가 단가하락의 이유로 폐기된다고 한다. 더럽거나 재활용 수칙을 올바르게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재활용 업체의 입장에서 이윤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소포장 배달용기와 같이 기업의 입장에서 '마이너스'인 쓰레기들은 그렇게 소각하여 폐기 처분된다. 이렇듯, 실제로 분리 수거된 쓰레기가 어디에서, 어떻게 재활용되는지는 분리수거장에서의 개인적 노력 바깥의 일이다.
평균적인 개인이 석유기업들이 배출하는 온실가스만큼의 환경오염을 하기 위해서는 백만 년 이상이 걸린다고 한다. 이런 현실 속에서, 기후위기와 관련된 정치적 담론을 "분리수거나 똑바로 해"로 일축하는 것이 과연 정답일까? 누군가는 비닐 종이와 같은 쓰레기 하나를 버리면서도 미묘한 찝찝함과 죄책감을 감내해야 하는데, 누군가는 손가락 하나만으로 몇 천 명, 몇 만 명의 노력을 백지화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과연 정당할까?
"분리수거나 해"라고 말하는 사람의 논리는 간단하다. 사회에 존재하는 정치적, 철학적인 '틀'은 이미 완벽하니, 개인적인 노력만 하라는 것이다. 2장에서 소개한 라이프니츠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이미 너 없이도 "가능한 모든 세계 중 최고"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데, 그것을 왜 굳이 바꾸려 하냐는 뜻이다. 마치 종이는 종이대로, 비닐은 비닐대로 컨테이너에 담겨 있는 쓰레기처럼,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틀을 의심치 말고 주어진 바에만 신경 쓰며 살아가라고 이들은 이야기한다. 내 눈앞의 질서정연하게 분리수거된 쓰레기들은 그렇게 묘하게도 분리수거의 정치학을 닮아 있다.
인문학, 무질서의 힘
분리수거는 혼란스럽게 섞인 쓰레기 더미에 질서를 부여하는 과정이다. 종이는 종이대로, 비닐은 비닐대로 분류하여 무질서한 상태의 혼합물을 질서정연한 상태로 만든다. 인문학이 하는 건 어떻게 보면 분리수거의 반대다. 인문학은 평면적인 정답을 강요하는 사회에게 실제로 인간의 본질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되짚는 학문이다. 철학은 정의(定義)를 묻고, 틀을 의심한다. 역사학은 거대담론을 해체하며, 문학은 언어의 한계를 시험함으로써 인간 사유의 범위를 확장한다. 그런 즉 인문학은 글월 자체를 탐구하는 인문학(人文學)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본질에 대해 묻는다는 점에서 인문학(人問學)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그렇게, 인문학자들은 질서정연하게 맞춰진 사회의 틀에 질문을 던지고, 때로는 그를 문제시하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 봤을 때, 인문학은 개념적으로도, 기후 정치적으로도 분리수거의 대척점에 서 있다.
2021년 IPCC가 발표한 제6차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의 영향으로 대기, 해양, 육지가 따뜻해졌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대기, 해양, 극저권 및 생물권에 광범위하고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과학의 결론은 내려졌다. 기후변화는 더 이상 자연의 문제만이 아닌 인간의, 인간에 의한, 그리고 인간에 의해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이다. 그런데도 기후변화를 인간에 대한 탐구 없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 아닐 수 없다.
기후위기의 가장 시급한 문제는 과학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인문이다. 과학자들의 결론은 이미 자명하다. 그럼에도, 인간 사회는 아직까지 기후변화가 실존하는지, 그것이 인간의 탓인지, 그리고 그에 대해 무엇을 하기는 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기후위기라는 환경은 우리 사회가 정보를 선별하고 전달, 그리고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데 취약함을 들춘 셈이다. 지금은 그 언제보다 사회의 틀을 의심하고 재정의하며, 함께 살아남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찰이 필요한 시기이다.
방으로 올라와 분리 배출되지 않은 채, 혼잡하게 섞인 쓰레기 더미를 바라본다. 깔끔하게 정리정돈된 분리수거장의 컨테이너보다 무질서하다. 마치 종이, 플라스틱, 비닐 따위로 분열된 하나의 사회를 보는 것 같다. 사람들은 보통 분열을 나쁜 것이라고 보곤 한다. 분열은 감정을 상하게 하며 갈등을 고조시킨다는 이유다. 그러나, 사유가 뒷받침된 분열은 사회에 건강하고 생산적인 역할을 한다.
종이는 종이대로, 비닐은 비닐대로, 플라스틱은 플라스틱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사불란하게 도열해 있는 분리수거장의 쓰레기처럼 구성된 사회는 어떨까? 어떠한 분열도, 갈등, 논쟁도 없이 기계처럼 돌아가는 사회 말이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런 사회는 7장에서 소개한 한나 아렌트가 이야기한 전체주의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달리, 스스로 생각하는 개인들은 사유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비판과 토론을 마주하기 때문이다. 사회의 분열과 갈등은 얼핏 무질서하게 보이지만,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어주는 결정적인 요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분열이 모이고 모여 "우리는 어떻게 함께 잘 살아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할 때, 분열은 더 이상 분열만이 아닌 "다양성"이 된다. 인류 최대의 위기를 맞은 지금, 무엇보다 건강하고 생산적인 분열이 필요한 시기이다.
그렇기에, 하나하나의 관점이 모두 소중하다. 이 책에서 소개한 8명의 인문학자들은 모두가 '종이는 종이대로, 비닐은 비닐대로'를 외칠 때, '종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물으며 비닐 종이의 본질을 떠올린 이들이었다. 비닐 종이에 대한 나의 고찰은 하등 쓸모가 없는 잡념으로 끝이 났지만, 이들 8명이 일군 사유는 수많은 이들의 '틀'을 바꾸어 놓았다. 인문학이 때로는 불필요하게 상황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인문학의 가장 큰 힘은 결국 그 무질서함에 있다.
우리는 볼테르, 소로, 아렌트와 같은 반열의 인문학자는 아니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는 것은 결국 한 천재적인 인문학자가 아닌, 그들의 말을 곱씹고, 비판하고, 수용하는 시민들의 힘이다. 루소의, 울스턴크래프트의, 싱어의 의견도 한때는 그저 치기 어린 소수의 반항으로 여겨졌지만, 현재 그들의 철학이 조각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그렇지 않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즉, 기후위기를 극복할 인문학의 중심인 "인문"에는 사람, 즉 바로 당신이 있다.
당신은 쓸모없지 않다. 눅눅한 종이 빨대와는 달리 말이다.
참고문헌
아로마티카&라이프, "대한민국 재활용률 세계2위, 숨겨진 비밀", 2020.03.19.
한국일보, "당신의 재활용 수고, 60%는 그대로 버려진다", 2020.12.22.
Oxfam, "Carbon Billionaires: The investment emissions of the world's richest people", 2022.
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 (IPCC), "Sixth Assessment Report",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