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퇴근길, 현관 앞 (01)

투명 비닐우산

by JUNI KANG


군대를 전역한 지 한 달쯤 되는 날이었다.

겨울치고는 포근한 날씨였다. 눈이 온다는 예보는 비로 바뀌었고, 진눈깨비가 흩날리고 있었다.


민우는 군대 동기들과의 약속 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이미 집을 나선 뒤였다. 빗줄기가 굵어질 것 같아 편의점에 들러 오천 원짜리 비닐우산을 하나 샀다.


투명한 비닐우산을 펼치고 걷던 민우의 시선이 앞서가는 한 노인에게 머물렀다.

비에 젖어 축 늘어진, 제 몸보다 한 치수는 더 커 보이는 패딩 점퍼가 노인의 구부정한 허리를 더 작고 왜소하게 만들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민우는 발걸음을 늦춰 노인의 머리 위로 우산을 기울였다.

"아니, 괜찮습니다."

노인은 사양했지만, 민우는 웃으며 말했다.

"가는 길인데요. 뭐"


노인은 딸이 다니는 회사를 찾고 있다며 낡은 휴대전화를 꺼내 문자를 보여 주었다. 화면에는 회사 이름과 주소, 그리고 이름이 적혀 있었다.

어딘가 익숙한 회사 이름이었지만 당장 정확한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다. 민우는 어차피 가는 길이라며 함께 가보자고 노인에게 말했다.


노인은 M 시에서 왔다고 했다. 걷는 내내 잦은 기침을 했다.


십여 분을 헤맨 끝에 낡은 4층짜리 가방 공장 빌딩을 찾았다. 민우는 빗물이 고인 주차장을 가로질러 1층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이선미'라는 이름을 대고 면회를 요청한 뒤, 다시 밖으로 나와 투명한 우산 아래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잠시 후, 작업복 위에 앞치마를 두른 여자가 계단을 내려왔다. 스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그녀의 얼굴에는 아버지를 마주한 순간 난처함과 반가움이 교차했다. 비를 맞아 젖어버린 아버지의 어깨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뭐 하러 여기까지 오셨어요? 급한 일도 아닌데……."

핀잔 섞인 말투였지만 그 안에는 다정함이 배어 있었다.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딸을 바라보았다. 먼 길을 달려온 피곤함보다는, 무사히 일하는 딸을 확인했다는 안도감이 그 노쇠한 얼굴을 채우고 있었다.


민우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작업복 차림이었지만 여자의 인상은 단정하고 또렷했다.

빗물에 젖은 건물 앞에 마주 선 부녀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회색 하늘과 젖은 아스팔트, 그리고 낡은 건물 출입문 틈으로 새어 나오는 차가운 형광등 불빛. 그들을 비추는 조명만 하나 있었어도 그대로 촬영장이라 해도 믿을 만큼 장면은 또렷했다.


노인은 민우를 가리키며 이 청년이 여기까지 우산을 씌어주고 길도 찾아주었다고 딸에게 알려주었다.

여자는 그제야 민우를 제대로 바라보았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눈이 마주쳤고, 그 순간 시간이 멈추었다. 빗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지는 것 같았다.

여자는 이내 어색하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했다.

아버지 역시 눈가에 깊은 주름을 잡으며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다.


민우는 가볍게 목례하고 몸을 돌렸다. 더 머무는 것이 그들의 오붓한 재회를 방해하는 일 같았다.

뒤돌아 몇 걸음 걷다가 무심코 고개를 돌려보니, 여자가 노인의 젖은 어깨를 조심스럽게 털어주고 있었다.




그날 밤, 군대 동기들과 술을 마셨다.

제대 축하라며 소주잔이 몇 번이나 돌았다. 누군가는 취업 이야기를 했고, 누군가는 복학을 미뤄볼까, 고민 중이라고 했다. 웃음소리는 컸지만, 민우는 대화에 녹아들지 못했다. 동기들의 목소리는 귓가에서 웅성거릴 뿐, 정작 마음속에는 단 한 마디도 들어오지 않고 겉돌았다.


막차 버스에 올라 집으로 돌아가는 길, 창문에 맺힌 빗방울 사이로 비친 자기 얼굴을 보며 민우는 복학 문제를 생각했다.

학교로 돌아가는 것이 맞는지, 아니면 전혀 다른 길을 찾아야 하는지. 당장 학비는 또 어떻게 조달해야 할지. 어쩌면 오늘 만난 그 여자처럼, 일찌감치 세상 어딘가에 제 몫의 자리를 잡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쉽게 결론이 나지 않는 질문들뿐이었다.


그날 밤, 불을 끄고 누웠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몇 번이나 몸을 뒤척이다가 결국 천장을 바라보았다.

자꾸 낮에 보았던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비에 젖은 회색 건물 앞에 서 있던 모습. 작업복에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지만, 이상하리만큼 단정해 보이던 얼굴이 어둠 속에서 자꾸만 선명해졌다.

무엇 때문인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선미.


민우는 그녀의 이름을 가만히 되뇌어 보았다.

그녀가 계단을 내려오던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

작업복 차림, 젖은 바닥, 빛바랜 건물 벽. 영화 촬영 현장 같았던 그 순간이 이상하게도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괜히 웃음이 났다. 이름 하나 기억한다고 달라질 게 있나 싶었다.




한 달쯤 지난 뒤였다.

복학 신청과 학자금 대출을 문의하러 학교에 들렀다가 친구들과 밥을 먹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버스가 시장 앞 로터리를 돌아갈 때, 무심코 창밖을 보다가 그 건물을 보았다.


작은 가방 공장이 들어서 있던 그 빌딩.

순간, 가슴이 가볍게 뛰었다.


한동안 잊고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부끄럽게 고개를 숙이던 표정과 작업복 위로 묻어 있던 차분한 분위기가 또렷하게 떠올랐다.


그녀가 보고 싶어졌다.

말 한마디 제대로 나눈 적도 없는데,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자꾸 그 앞에 멈춰 섰다.


‘한 번쯤은… 다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그 지점에 닿자 걷잡을 수 없었다.

개강하기 전, 한 번은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뒤였다.

친구가 부탁한 아르바이트를 도와주러 버스를 타고 가던 중이었다. 시장 앞을 지날 때, 습관처럼 그녀의 빌딩 쪽을 바라보았다가 민우는 순간 숨을 멈췄다.

그녀가 건물 앞 주차장에 나와 있었다.


멀리서도 단번에 눈에 들어오는 모습이었다. 직원 몇 명과 함께 승합차 뒷문을 열어두고 서 있었다.

가슴이 갑자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민우는 거의 반사적으로 하차 벨을 눌렀다. 잠시 뒤 버스가 멈추자마자 뛰어내렸다.


오던 길을 되돌아 빌딩 앞으로 달려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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