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의 세계

복잡하고 오묘하지만 때론 단순한.

by 소사리

괴로운 시간들이 나란히 지나간다. 요즈음 나의 일기장은 불행으로 가득하다. 마치 내가 불행의 수집가가 된 것 같기도 하다. 그 중 내가 수집한 10월 23일의 불행을 소개한다.



2025.10.23. 목요일.


또 시간이 꽤 흘렀다. 누구도 다시 보지 않을 일기를 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마음이 정리 되지 않고 출렁일 때 연필 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감정을 종이에 담는건 꽤 위로가 되는 일이다.

넷플릭스로 점철된 주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난생 처음 대상포진에 걸린 나는 포진이 꽤 심하지 않음에도 무척 심한 정도의 통증을 느끼고 있다. 그런 내 상태를 달래주는건 넷플릭스 뿐이다. 하지만 때로는 오히려 영상들이 나를 더 힘들게 하기도 한다.

오늘 본 '명랑 소녀 성공기'나 '로맨틱 어나니머스'는 둘 다 재미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나를 괴롭게 했다. 특히 한효주와 오구라 슌(?)의 결혼식 장면은 내 마음을 뒤집어서 마구 흔들어댔다. 서로를 강하게 끌어당기는 장나라와 장혁의 풋풋한 연기는 마음을 아리게 했다. 서로 손을 꼭 맞잡고 뛰어가는 둘. 믿음의 깍지. 서로를 사랑한다는 확신. 나를 믿으라는 눈빛과 행복에 겨운 웃음이 내 상황과는 전혀 달라서 서러움에 눈물이 났다.

나도 그랬었는데. 나도 내 인생을, 남은 시간을 영원히 함께 보내도 좋을 그런 사람과 결혼을 했었는데. 내가 한없이 믿는 사람. 의지하는 사람. 지금은 다르다. 눈을 맞추기도, 입을 맞추기도 어렵다. 포옹을 할 땐 로봇처럼 삐걱거리고, 어디 나갈 땐 손을 잡지 않은지도 오래다. 더욱이 나를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사람.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분명히 내 잘못은 아닌데 내 잘못을 찾게 된다.

마침 오늘 받은 건강검진 결과도 종전보다 나쁘다. 아무래도 나는 혼자 살게 될 것 같다. 사랑으로 확신을 주지 않는 사람과는 살 수 없다.



지금 읽어도 '음, 확실히 불행했군.'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내 삶의 한 조각이다.


그 후로 약 7일 정도, 나는 불행을 수집하는데 몰두했다. 부족하다 싶으면 만들어내서라도 불행해지고야 말겠다는 굳은 다짐을 한 것도 아닌데 매일매일 더 깊고 더 검은 불행을 수확할 수 있었다. 마침내 그의 입에서 '더는 못 하겠다.', '이혼하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나서야 나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내 입이 다물어지고 난 뒤에는 더이상 나오지 못한 말들이 눈물로 변해 오랜 시간 끊임없이 흘렀다.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은 자세로 한참을 소리없이 울었다. '사람이 정신적으로 황폐해지면 이렇게 오랜 시간을 가만히 있어도 지루하지가 않는군.'. 이런 생각을 두세 번 떠올리고 나서야 방으로 향했다. 마침 문고리에 걸려 있는 스트레칭 밴드가 보였다. '목을 감아 볼까.' 단단히 손잡이에 감아 목에 둘렀다. 무엇을 조이기엔 그 길이가 짧았다. 이런 나의 모습을 남편에게 들켜서도 안됐다. 어떤 느낌일지 탐색하는 숙제를 부여받은 사람처럼 조용히 둘러 멨다. 숨이 막혔다. 간신히 숨이 쉬어 질 정도로만 조여진 밴드와 그 안에서 쌕쌕거리는 내 몸, 그리고 어두운 채 나를 담고 있는 내 방만이 느껴졌다. 숨을 바삐 몰아 쉬는 가운데 잠이 오는 것 같은 기분. 아쉽지만 다행스러웠다. 나는 죽을 수 없겠구나. 왜냐하면 고통도 죽음도 너무 무서우니까. 그러니까 나는 다시 살아야겠구나. 다시 시작해야겠구나.


잠시 뒤 내 방으로 찾아온 남편은 자신이 뱉은 말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했다. 자기가 너무 힘들어서 그랬다며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것 처럼 따뜻하게 대했다. 대충 목을 메려고 했다는 것을 알았는지 뭔지, 아니면 그냥 내 상태가 영 살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는지 죽지 말라는 말을 덧붙이며 내 잠자리를 살펴주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나를 깨우러 온 남편이 내 발을 만지더니 난방텐트를 겉고 안으로 들어왔다. 아침에 텐트 안으로 들어오는 일은 없었는데, 들어와서 내 얼굴을 보더니 '헉'소리를 내면서 내 왼쪽 뺨을 손으로 매만졌다. 아마 내가 밤사이 죽은 줄 알았던 것 같다. 발도 차갑고 누운 상태에서 만져도 움직이지 않으니 놀랐던 듯 하다. 슬프고 무서운 일임에도 남편이 나를 걱정해준게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죽으면 어떤 얼굴일지 궁금했는데, 죽지 않고도 알게 된 것 같아서.


그 후로 남편은 조금 달라졌다. 마치 내가 살아돌아온 사람인 것 처럼 대해준다.

나도 조금 달라졌다. 한 번 죽었던 사람인 것 처럼 마음이 넓어진걸까.


일단 나는 말을 줄였다. 며칠간은 텍스트 음성 변환 어플과 채팅 어플만을 사용해서 대화했다. 말을 줄이니 다툼이 줄어든다. 남편은 근 몇 년 간 하지 않던 따뜻한 행동들을 한다. 침대에 누워 있는 내 위에 포개에 눕는다거나, 갑자기 안아준다. 희한한 일이다. 게다가 오늘은 즉흥적으로 시흥 은계호수에서 열린 2025 커피콩 축제에 같이 다녀왔다. 희한한 일이다.


물론 언제까지 이런 상태일지 알 수 없다. 당장 내일 역시 안되겠다며 법원으로 달려갈지도 모른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히 알았다. 부부의 세계는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것. 복잡하고 오묘하지만 때로는 무척 단순해서, 겉으로 봐서 아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 또 그 속을 한참 헤짚고 찾아 헤매도 알 수 없던 것들이 갑자기 떠올라 '내가 정답이요!' 외치는 순간이 있다는 것. 내일은 또 어떤 세계가 펼쳐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