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이주를 연구하다 보면 사람의 이동뿐 아니라 한 국가의 성장과 쇠퇴의 역사를 배우게 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발견은 이주가 제국의 흥망성쇠에 중요한 촉발제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이글에서는 이주의 한 형태인 디아스포라가 제국의 흥망성쇠에 영향을 미친 역사적 사례들을 소개하고, 이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에 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디아스포라는 한 민족이 타의에 의해 모국을 떠나 해외로 흩어지는 민족이산을 이르는 말이다.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디아스포라는 유대인의 이산이다. 유대왕국이 멸망하면서 유대인이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갔고, 그 이후 로마 제국에 의해 예루살렘이 파괴되면서 유대인이 전 세계로 흩어졌다. 중세 시대 유대인은 거주국에서 토지를 소유할 수 없어서 대금업자, 상인, 무역상, 보석상, 의사, 관리, 법률가 등과 같이 돈과 지식과 관련된 직업에 종사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쉽다’는 성경 구절처럼 부의 축적을 금기시한 가톨릭의 교리는 이교도인 유대인이 사회적으로 천시하는 대금업에 종사할 수 있게 하였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의 주인공인 샤일록이 악독한 고리대금업자로 등장하는 것은 이런 시대적 배경을 반영한다. 은행을 의미하는 뱅크(bank)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부유했던 도시인 베네치아 광장에서 유대인 대금업자들이 방카(banca)라는 긴 탁자를 놓고 영업을 한데서 유래한다. 유럽 각지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은 그들만의 국제 교역 네트워크를 활용해서 상품의 지역별 시세 정보를 공유하고 막대한 시세 차익을 얻으며 부를 축적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이후 유대인은 예수를 죽인 살인자로 인식되고 돼지라는 뜻의 ‘마라노’로 불리며 유럽 각지에서 박해를 받았다. 유대인이 기독교들의 박해를 피해 비교적 관대한 대우를 받았던 곳이 지금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해당하는 이베리아반도였다. 8세기에 이슬람교도인 무어인들이 이베리아반도를 침공하고 이슬람 왕국을 건설했다. 타종교에 대해 관용적 자세를 취했던 이슬람 왕국에서 유대인은 10세기부터 13세기까지 재상의 지위에 오를 만큼 경제, 학문, 의학, 문학, 예술 분야에서 찬란한 황금기를 구가했다.
하지만 14세기 스페인 북부에 있던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이 합쳐지고 ‘레콩키스타’라고 불리는 국토회복전쟁에서 마지막 남은 이슬람 왕조인 그라나다 왕국을 점령하면서 유대인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라 1세와 아라곤 왕국의 페르디난드 2세는 통일 왕국의 정신적 통합을 위해 이교도들을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강요하고 이를 거부하는 이들은 종교재판에서 처형하거나 외국으로 추방했다. 15세기 대항해시대를 열고 중남미를 식민지로 개발하면서 최초의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형성한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자신을 가톨릭의 수호자로 여기고 유럽 각지에서 종교 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자국에서는 이교도를 철저하게 탄압했다. 이로 인해 스페인에서 1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추방되어 타종교에 대해 관용적이었던 네덜란드와 영국 등지로 이주했다. 이들은 상공업, 무역업, 금융업, 전문기술직에 종사했던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앙트레프레너’인데, 이들의 추방으로 인해 스페인은 상공업의 몰락을 지켜봤고 이들을 수용한 네덜란드와 영국은 새로운 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다.
이 당시 스페인에서는 ‘모리스코’라고 불리는 이슬람 조상을 가진 이들도 종교적 박해를 받았다. 비록 이들이 가톨릭으로 개종을 했어도 진심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불신과 북아프리카에 기반을 두고 스페인 무역선을 약탈하는 해적들과 내통할 수 있다는 의심 때문에 강제로 추방을 당했다. 당시 이들은 스페인에서 농업과 수공업에 종사하면서 경제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했었고, 발렌시아에서는 인구의 1/3을 차지할 만큼 중요한 인구집단이었다. 펠리페 3세에 의해 30만 명의 모리스코가 추방되었는데, 이로 인해 스페인은 16세기 말부터 17세기에 걸쳐 심각한 산업의 공동화를 경험했다.
16세기는 종교로 인한 폭력과 전쟁이 난무했던 시기였다. 16세기 초에 시작한 종교개혁과 함께 신흥 부르주아 계급으로 성장한 신교도들과 이들을 저지하려는 구교도들 간의 갈등이 첨예했다. 프랑스에서 칼뱅 사상을 따르는 ‘위그노’ 신교도들은 전체 인구의 10%를 차지할 만큼 성장했다. 하지만 강력한 왕권을 위해 프랑스를 하나의 종교로 통일하고자 했던 루이 14세와 같은 왕들에 의해 위그노는 극심한 종교적 박해를 받았다. 프랑스 전역에서 위그노 학살이 자행됐고, 생명을 구하기 위해 20만 명에서 100만 명 사이의 위그노들이 영국, 네덜란드, 독일, 스위스 등지로 망명했다. 이들은 프랑스에서 실크제조업과 같은 면직업, 시계 제작, 가구 디자인, 건축 등에 종사했던 앙트레프레너였고, 교육 수준도 높았던 엘리트 계급이었다. 이들이 떠나면서 프랑스는 심각한 경제 침체를 겪게 됐고, 국가 재정이 고갈되자 평민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가했고, 이에 민중이 봉기하면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반면 이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네덜란드, 영국, 독일, 스위스는 면직업과 같은 제조업의 발달을 이룩했다. 특히 영국은 프랑스가 독점했던 실크 제조기술을 위그노를 통해서 전수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해서 면직업을 발전시키고, 17세기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전 세계에 영국의 면직물을 수출해서 막대한 국부를 축적하며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을 건설했다.
위의 세 가지 역사적 사례들을 통해 우리는 디아스포라가 제국의 흥망성쇠를 가져온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람의 이동, 특히 앙트레프레너의 이동은 지식, 기술, 자본, 무역망의 이동을 수반하며 이들을 잃은 국가는 쇠망했고 이들을 수용한 국가는 혁신과 발전을 거듭했다. 국민의 동질성을 강조하면서 종교, 인종, 국적의 다양성에 비관용적인 국가는 인재를 잃었고, 실용주의와 문화 다양성을 존중하는 국가는 국가 발전의 새로운 동력을 얻었다.
세계 4대 강국의 틈바구니에 껴있고, 더욱이 저출산과 고령화로 생산인구가 줄어드는 대한민국은 앞으로 어떠한 길을 가야 할까? 세계의 디아스포라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늘 고민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해답 역시 디아스포라에서 찾는다. 종교적 관용성, 개방성, 실용주의가 해외의 인재를 끌어들이고 이들이 혁신과 발전의 원동력을 제공한 사례를 유대인, 모리스코, 위그노의 디아스포라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도 코리안 드림을 찾아 한국으로 이주한 외국인들을 환대해서 이들과 함께 더 큰 대한민국을 만들어 갈 수 있기를 바란다.
이 글은 2021년 1월 30일에 『호모 쿨투랄리스』 (한양대 평화연구소)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