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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근거림 Nov 18. 2023

기다림이 내게는 익숙한 걸

유치원 때와 달리 초등학생이 되어서는 식탐이 늘어 불에 공기라도 불어넣은 듯한 빵빵함을 유지했다. 그런데 이 식탐이 어느 정도였냐면 식사량을 스스로 조절하지 못해 토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큰 이모네 놀러 갈 때면, 누나와 함께 가던 분식집이 있었다. 사촌 누나의 소개로 알게 되었는데 남은 떡볶이 양념에 계란 노른자를 비벼먹던 순간을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 분식집만 가면 이모네 집으로 돌아와 토를 했다. 맛있던 나머지 끝까지 욱여 먹었던 탓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반 친구들과는 특별히 친해지지 않았다. 생일파티를 하는 친구들의 초대는 받는 편이었지만, 한 명, 한 명에게 다가가 깊게 어울리지는 못했다. 가만히 살펴보면 무리에는 꼭 있으나 특별히 말을 섞지 않는, 그런 모습을 상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나는 표현하기보다는 살피는 편이었고, 먼저 말하기보다는 주로 반응하는 편이었다.


학교와 달리 동네에는 어울려 지내는 친구들이 있었다. 전화는 서로 하지 않는 편이었다. 학교나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다 보면 뛰노는 친구들을 발견하곤 했다. 집에 있다가 시끌벅적한 소리를 듣고 한걸음에 집밖으로 뛰어나간 적도 많았다. 마주 오는 자동차 두 대가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아파트 단지에서 우리는 축구와 피구, 얼음땡, 경찰과 도둑 같은 놀이를 하며 우정을 쌓아갔다. 


가정은 또한 평화로웠다. 우리가 살던 아파트에는 화단이 조성되어 있었다. 화단과 통행로 사이에는 널찍한 돌이 장식되어 있었는데, 어른이 앉기에 충분한 면적이었다. 엄마는 동네 이웃들과 화단에 둘러앉아 담소를 자주 나눴다. 그 당시에는 이름보다 아파트 호수로 사람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를 테면 "엄마 113호 아주머니네 갔다 올게" 하는 식이었다. 화단에는 우리 엄마를 포함하여 113호, 104호, 301호 아주머니, 그 외에도 많은 이웃이 떠들썩하게 어울렸다. 누나방에서 컴퓨터를 하다 보면 엄마의 웃음소리가 2층에 있던 우리 집까지 선명하게 들려오곤 했다. 


빌라에 가까웠던 우리 아파트는 방 두 개에 거실로 구성되어 있었다. 누나가 방 하나를 사용하고, 엄마와 아빠, 내가 안방에서 생활했다. 밤이 되면 안방에 불그스름한 조명등을 켜고 부모님과 나란히 잠을 자던 장면이 떠오른다. 코 고는 소리를 내뿜는 아빠, 화장실에 혼자 가기 무서워 전전긍긍하던 나, 조용히 잠을 청하던 엄마, 잠에 들었는지 모를 건너편 방의 누나. 아침이면 식탁에 차려진 된장찌개와 흰쌀밥. 반찬 투정을 하던 탓에 소시지나 돈가스가 식탁에서 사라지는 경우가 드물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반기는 엄마와 실컷 뛰놀고 들어와 목욕을 하며 "까치가 형님이라고 부르겠네" 라던 아빠. 그룹 HOT가 나오는 방송을 녹화하라며 신신당부하던 누나. 이 시기의 우리 가족은 에너지가 넘쳤고, 정이 흘렀다.


나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이 시기에는 또한 기다림이 익숙한 아이였다. 앞서거나, 뒤따라 표현하지 못한 마음을 기다림으로 드러내는 편이었다. 나는 같은 아파트에 살던 동욱이 형과 자주 어울렸다. 형네 집에 가면 컴퓨터도 있고, 게임기도 있어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함께 놀곤 했다. 특히, 형은 축구를 잘했는데 공을 지니고 상대편을 요리조리 피하며 드리블하는 모습을 닮고 싶었다. 형은 당시 포방터 시장 근처에 있는 수학 학원에 다녔다. 여러 학생이 디귿자로 된 책상에 모여 앉아 선생님이 돌아가며 지도하는 단체 과외 형태였다. 빨간 회초리를 손에서 놓지 않던 모습이 인상 깊었는데, 이처럼 생생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나 또한 언젠가부터 그 선생님에게 과외를 받았기 때문이다. 선생님의 나이는 할머니에 가까운 듯했는데, 남편으로 추정되는 분이 마당에서 구구단을 외워보라고 시키던 장면 또한 생각난다. 무엇을 어떻게 배웠는지 보다 회초리가 단단하고 아팠던 기억이 더욱 생생하다.


동욱이 형만 수학 과외를 받던 시기에, 하루는 형과 과외를 하던 집 앞까지 같이 걸어간 적이 있다. 오후 4시 즈음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세상은 점차 갈색 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옷이 얇았던 탓인지, 일찍이 추위를 많이 탔던 탓인지 매서운 바람이 손과 목, 얼굴은 주로 간지럽혔다. 형은 과외를 받으러 들어갔고, 나는 집으로 올라가면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자니 혼자 놀아야 할 것이 분명했다. 형의 과외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형은 놀라게 해 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과외 장소는 인적이 드문 골목길에 있었다. 햇볕이 잘 들지 않았는데 나는 형이 지나갈 길에 서서 하염없이 놀라며 반가워할 형의 반응을 상상했다. '이 추운 날씨에 한 시간을 꼬박 형을 위해 기다렸으니, 얼마나 기뻐해줄까?' 콧물은 흐르고, 닦아내던 손가락은 딱딱해져 갔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형을 놀라게 해 줄 수만 있다면, 기쁘게 해 줄 수만 있다면. 


추위에 굳은 몸이 집으로 들어가면 슬며시 풀어지듯, 이윽고 나타난 형의 모습에 얼었던 얼굴이 살포시 피어났다. "아니, 추운데 왜 밖에서 기다렸어!" 형은 다그치듯 말했지만, 집으로 돌아가던 10분 남짓한 시간 내내 노을처럼 포근한 얼굴로 나를 대했다. 예상대로 기뻐하는 형을 보며 나도 덩달아 기뻤다. 기다린 보람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가족들에게도 기다림으로 마음을 표현하는 편이었다. 아빠가 회식으로 늦을 때에, 누나나 엄마가 약속으로 늦을 때에 아파트 단지로 들어서는 유일한 계단 뒤에 서서 하염없이 기다리고는 했다. 어두웠던 밤이 더욱 어둑해져도, 달빛을 한껏 머금은 눈을 크게 뜨고 마을버스에서 내릴 아빠와 누나, 엄마를, 계단을 오르며 발견할 나와의 장면을 상상하며, "아이고, 왜 나와서 기다렸어" 하며 기뻐할, 기다렸을 뿐인데 가치 있는 존재가 되어버리는 기쁨의 순간을 위해.


Image by mickyhz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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