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휴가를 내고 엄마를 대신하여 조카들을 돌보아야 할 때가 있었다. 그런 날에는 조카들이 하원하는 시간에 맞추어 유치원에 갔다. 유치원 입구에서 보호자임을 확인하면, 선생님은 교실로 들어서며 "우진이, 서진이, 삼촌 왔어요" 외친다. 조카들 중 한 명이 나를 먼저 발견하면 "따기 왔어! 따끼!" 하며 형제에게 소식을 전한다. 조카들은 알록달록한 가방을 메고 신발장으로 다가서며 "따끼 왜 왔어?" 묻는다. 우진이와 서진이는 왜 왔냐고 물었지만, 그들의 천진한 얼굴을 보면 우리의 놀이가 이미 시작된 것만 같았다.
조카들은 한창 악당을 물리치는 상황극을 좋아했다. 지구에 위협이 되는 존재는 당연하게도 나였다. 둘은 저마다 상상하는 최고의 방법으로 나를 공격했다. 때로는 직접 때리기도 했고, 때로는 특이한 주문을 외우며 공격하기도 했다. 나는 공격받은 부위를 움켜쥐고 '크으으윽' 같은 효과음을 냈다. 안방을 지키는 용사는 두 명이었으므로 나는 차례대로 다가갔고, 보기 좋게 누웠다.
조카들이 조금 더 크고서는 포켓몬스터로 상황극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포켓몬 트레이너 역할을 주로 맡았다. 상황은 대부분 주인공 지우의 고향 태초마을에서 시작한다. 나는 인형으로 된 몬스터볼로 조카들 중 한 명을 파트너 포켓몬으로 사로잡는다. 물론, 몬스터볼을 몇 차례 던지는 각고의 노력 끝에 잡을 수 있다. 나머지 조카는 야생에서 마주치는 포켓몬 역할을 맡는다. 여기서부터 포켓몬들 간에 치열한 대결이 시작된다. 내가 상황에 몰입한다면 파트너가 야생 포켓몬을 기진맥진하게 만들기를 응원해야 한다. 하지만, 자칫 몸싸움으로 번질 수 있는 포켓몬들의 힘 겨루기에서 나는 조카들을 보호해야 했다. 그럴 때 자주 사용했던 방법이 "태초마을에 밤이 찾아왔어요. 모두 잠에 들 시간이에요" 말하며 형광등 불을 끄는 것이었다. 그러면 조카들은 '까르르' 웃다가 진지한 목소리로 "태초마을에 아침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말하며 불을 켰다. 포켓몬스터 놀이에서 나는 대체로 중재하거나 화해를 제안했고, 포켓몬 트레이너, 파트너 포켓몬, 야생 포켓몬 셋이 함께 여행하는 과정으로 이끌고는 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때에 포켓몬스터 열풍이 처음 불었다. 너나 할 것 없이 텔레비전으로 포켓몬스터를 보았고, 띠부띠부씰을 모으는 친구들도 많았다. 조카들처럼 나와 친구들도 포켓몬스터 상황극을 했었다. 우리에게는 다만 포켓몬 트레이너가 되어 줄 어른은 없었다. 스스로 포켓몬 트레이너이자 파트너 포켓몬이 되어야 했다. 예를 들어, 내가 친구에게 몬스터볼을 던지는 시늉을 하며 "파이리, 가라!" 외쳐도 파이리는 나타나지 않았다. 손으로 재빠르게 바닥을 짚으며 스스로 파이리로 변신해야 했다. 또한, 중재하거나 화해를 돕는 친구는 없었으므로 싸움이 나지 않도록 포켓몬 기술과 승패를 사이좋게 주고받았야 했다.
돌아보면, 나와 친구들은 재미를 추구했다. 동기는 순수했고, 상상력이 가미된 자연스러운 행동은 함께 어울리는 모두에게 웃음을 안겨주었다. 10분씩 주어지는 쉬는 시간의 교실은 떠들썩했다. 점심시간이 찾아오면 서둘러 밥을 먹고 운동장에서 뛰어다니기에 바빴다. 특히, 조카들이 포켓몬스터 놀이에 빠져있던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나와 친구들에게 동네가 온통 놀이터였다. 친구가 많을수록 좋았다. 공이 없어도 괜찮았다. 하나둘 친구가 모이기 시작하면 '어떤 놀이를 할까?' 생각하다가, 이 놀이, 저 놀이를 하다가, 반가운 친구가 다가오면 큰소리로 그의 이름을 다 함께 불렀다.
친구들과 뛰놀던 어린 나는 무언가가 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오로지 놀이에 참여했다. 다리가 후들거릴 만큼, 발바닥이 저려올 만큼 뛰었다. 이기면 기뻐했고, 지면 분했다. 시간도, 숙제도, 그날 있었던 일도 잊고 순간을 살았다. 태초마을에 밤이 찾아오듯, 우리 동네에도 밤은 기어코 돌아왔다. 손바닥으로 일찍이 내려 앉은 어둠이 더이상 눈에 보이지 않을 때면 베란다 문이 하나 둘 열리며 친구들의 이름이 불렸다.
"수호야! 밥 먹어라!" 내 차례가 되었다. "안녕, 나갈게!" 손을 흔들며 친구들에게 인사한다. 나는 집으로 들어서며 항상 '오늘 저녁 반찬은 뭘까?' 생각했다. 비엔나소시지가 식탁에 올려져 있으면 콩을 걸러내며 밥을 푸면서도 설레었다. 나는 소시지를 케첩에 찍어먹으며 그날 내가 활약했던 순간을 떠올리고, 떠올리고, 또 한 번 떠올렸다.
놀고 싶다. 내가 누구이든, 그게 무엇이든 새하얗게 잊고 그때처럼 달리고 싶다. 밥 먹으라고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까마귀가 형님이라고 부르겠다며 놀리는 아빠의 얼굴이, 아람단에서 새로운 배지를 받았다며 자랑하는 누나의 모습이 보고 싶다. 그리고, 나의 하루는 어땠는지 조잘대고 싶다. 나오는 대로, 내키는 대로, 그냥 그렇게 쏟아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