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와 귤
내가 태어난 제주는 사계절의 색이 뚜렷한 땅이다. 특히 내가 살던 남원읍 신례리에는 가을이면 귤빛으로 온 마을이 물들었다. 부모님은 귤 농사를 지으셨고, 가을은 곧 노동의 계절이었다.
이른 9월부터 극조생 감귤의 수확이 시작되었다. 햇빛을 머금고 노랗게 익은 열매를 따는 일은 어린 나에게 지루함과 피곤함을 안겨주었다. 귤밭에 매여야 한다는 사실이 불만스러웠다. 친구들도 귤 따러 가서 같이 놀 애도 없는데 말이다. 철없는 나는 귤밭에서 치기 어린 불평을 속으로 삭였다. 겨울이 와서 만감류를 수확할 때도, 그건 여전히 '일'일 뿐이었다.
귤밭을 벗어난 시간만큼은 나의 해방구였다. 날씨가 좋았던 가을날 오후, 해가 질 때까지 친구들과 신나게 뛰어놀았다. 거무스레 어둠이 내려앉은 후에야 집에 돌아갔었다.
집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현무암 돌담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경계를 구분해 주는 현무암 돌담. 어느 날 집으로 가는 길 돌담 위에서 번쩍이는 눈빛을 보았다.
흰색 바탕에 갈색 무늬가 섞인 작은 고양이. 돌담을 넘나들어 이 집 저 집의 음식을 탐낸다고 도둑고양이라고 불렀다. 녀석은 어둠 속에서 유난히 빛나는 형형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당시의 나는 그 눈빛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웠다. 늦게까지 논 것에 대한 꾸지람 같기도 했고, 미지의 공포이기도 했다. 녀석이 앉아있는 돌담 앞에서는 발이 떨어지지 않아 한참을 망설였다. 그 날카로운 시선은 나에게 부과된 일종의 통행세 같았다.
세월이 흘러, 나는 이제 귤 따는 일을 싫어하지도 않고 고양이를 무서워하지도 않는 어른이 되었다.
어린 날의 나는 귤밭의 고단함도, 돌담 위 고양이의 날 선 눈빛도 피하고만 싶었지만, 집으로 가려면 결국 그 고양이 곁을 지나야 했고, 부모님이 귤농사를 이어가는 한 해마다 수확을 함께해야 했다. 도망과 맞섬, 순응과 극복이 끝없이 되풀이되던 날들. 그렇게 쌓여간 순간들이 어느새 마음속에서 부드럽게 희석되어, 지금은 따뜻한 추억의 한 켠을 이루고 있다.
다음은 봄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