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수놓다.
제주를 소재로 작품을 만드는 이유를 묻는다면,
그것은 내가 경험한 제주도를 기억에만 머물지 않고 오래도록 회고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나를 관통했던 당시의 감정을 기록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나는 말로 모든 것을 다 표현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미지로 표현하는 것이 더 쉽다고 느낍니다. 언어로 다 담을 수 없는 여운(餘韻), 작품을 다시 들춰봤을 때 새롭게 해석이 가능한 생각의 확장, 그것이 바로 그림이 가진 힘이라 믿습니다. 그리고 그 그림을 다시 자수로 표현하는 것은, 저의 사유(思惟)에 가장 깊은 질감을 부여하는 행위입니다. 자수가 가진 매력은 무궁무진합니다. 평면의 그림 위에 면사, 울사, 리본사 등 다양한 실과 갖가지 비즈를 사용하여 작품의 느낌을 한층 더 살릴 수 있습니다. 실 한 올의 굵기, 스티치 기법의 방향, 반짝이는 비즈의 배치 하나하나가 캔버스에서는 불가능했던 촉각적인 감성을 만들어냅니다.
첫 작품, 싸늘한 겨울에 피는 '무해한 따뜻함'
저의 재도약을 알리는 첫 작품은 '제주의 사계절' 중 가장 먼저 '겨울'을 택했습니다.
제주의 겨울은 회색빛 하늘, 살을 에이는 차가운 바람, 바위에 부딪쳐 산산이 부서지는 매정한 파도가 지배하는 싸늘한 계절입니다. 내가 추위를 싫어해서인지 겨울을 더욱 매정하게 느꼈습니다. 하지만 문득, 이 차가운 계절을 조금 더 포근하게 기억하고 싶은 욕망이 솟아올랐습니다. 스스로에게 ‘제주의 겨울도 살아볼 만하다’고 위안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겨울 초입부터 봄이 오기 전까지 피는 꽃, 붉은 동백꽃은 회색빛 겨울에 유일하게 따뜻한 기운을 전해주는 존재입니다. 푸른색 계열의 바탕에 강렬한 붉은 동백을 수놓아 대비를 극대화했습니다.
그리고 그 붉은 꽃의 친구, 동박새를 함께 배치했습니다. 동백꽃의 꽃꿀을 먹으며 꽃가루를 옮겨주는 동박새는, 천적이 나타나면 동백나무 속으로 숨어들어갑니다. 싸늘한 겨울에 이 얼마나 무해하고 따뜻한 장면인가요! 존재만으로 서로의 평온이 된다는 것.
‘세상에 태어나 어려움이 생길 때 조건 없이 도움을 줄 수 있는 친구, 이득을 이용하려는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친구 한 명만 있어도 인생 참 잘 살았다며 마침표를 찍을 수 있겠다’는 저의 간절한 소망을 동백꽃과 동박새에 투영했습니다.
잊혀가는 제주 방언을 작품에 넣어보았습니다. ’영원한 것은 없다.‘는 세상 이치가 언어에도 적용이 되나 봅니다. 나의 감정과 기억을 오래도록 간직하기 위해 작품으로 기록하는 것처럼, 제주어가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제주어 사전을 뒤져가며 고운 말을 써내려 갑니다.
붉게 피어 통째로 지는 꽃의 침묵
또한 동백꽃은 제주도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동백꽃은 질 때 꽃잎이 흩날리지 않고 꽃대가 통째로 뚝 떨어지는 모습 때문에, 제주 4·3 사건 때 갑작스레 목숨을 잃은 무고한 희생자를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4.3 평화재단은 꽃을 통해 4·3 사건의 아픔을 널리 알리고자 합니다.
제주 겨울을 주제로 한 동백 작품은 이처럼 개인의 소망과 섬의 역사적 의미를 동시에 품고 있습니다. 붉은 동백이 주는 따뜻함은 겨울을 버텨내는 희망이며, 통째로 지는 꽃의 침묵은 제주의 아픔을 품은 모든 이들의 가슴을 섬세하게 어루만지고, 기억하려는 저의 다짐입니다.
다음은 제주 여름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