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식된 황금의 땅 (13)

최후 속의 기억, 숨겨진 교회

by 이샤라

지금 그녀가 눈앞에 있었다. 이곳의 다른 시신들과 달리, 그녀의 시신은 기이할 정도로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목 언저리까지는 마치 잠이 든 것처럼 깨끗했으나 그 아래로는 갑옷 틈새를 따라 검푸른 부패의 기운이 곰팡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시즈는 조용히 한 걸음 내디뎠다. 그리고,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뒤틀린 검은 창과 아직도 손에 꽉 쥐고 있는 칼자루를 번갈아 훑었다. 검은 피로 떡져 있었지만 최후의 순간까지 놓지 않은 손아귀에는 아직도 그녀의 신념과 의지가 깃들어 있는 듯했다.


조용히 손을 뻗으려는 순간, 차가운 공기가 살갗을 스쳤다. 그것은 단순한 기분 탓이 아니었다. 이곳에는 무언가가 남아 있었다. 시즈가 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자, 한기와 함께 알 수 없는 기운이 스며드는 듯했다.


"...라그나르 경, 엘리샤 님께 환시의 등불을 사용하면... 경이나 전쟁의 여신께서 보이셨던 것처럼 그녀의 마지막을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요?"


라그나르는 조용히 시즈의 말을 들으며 시선을 엘리샤의 시신으로 돌렸다.


"이 등불의 힘이 죽은 필멸자에게는 어떻게 작용할지... 저로서는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지금은 해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로스의 대답을 끝으로, 시즈는 말없이 환시의 등불을 받아 들었다. 조심스럽게 등불을 엘리샤를 향해 가져다 대자 빛이 은은하게 퍼져 나갔다.


그 순간, 빛이 깨어나며 세상의 형체가 찢어지는 듯한 이질감이 덮쳤다. 눈앞의 모든 것이 뒤틀렸고, 세 사람은 엘리샤의 의식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끄아아아아아악——!!"


"방패를 들어! 전열을 가다듬어라!"


"막을 수가 없다! 창이 너무 많——크헉!"


시야가 열리자마자 덮쳐온 것은 순수한 혼돈이었다. 형체를 인식할 틈도 없이 검은 액체를 뒤집어쓴 아우로라의 기사들이 무자비하게 도륙당하고 있었다. 공기가 비명과 함께 찢어지고, 쇠와 뼈가 뒤엉켜 부서지는 파열음이 고막을 후벼 팠다. 시야를 가득 메운 검은 창들이 은빛 갑옷을 종잇장처럼 꿰뚫면서 터져 나온 피들은 분수처럼 허공에 흩뿌려졌다. 숨을 쉴 때마다 끈적한 피비린내가 목구멍을 틀어막아 질식할 것만 같았다.


엘리샤는 온몸이 차가운 심해로 가라앉는 듯한 감각 속에서 필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흐릿한 시야 너머, 한 줄기 희미한 움직임이 보였다.


"어서 가! 빨리!!"


그녀의 외침과 동시에, 공간을 찢는 소리와 함께 검은 창들이 쇄도했다. 엘리샤는 망설임 없이 검을 세워 그 앞을 막아섰다.


카아아앙———


첫 번째 충격이 팔 전체를 뒤흔들었다. 뼈가 부서지는 듯한 고통에도 이를 악물고 버텨냈지만 연이어 들이닥치는 두 번째, 세 번째 창을 막아내는 순간, 손목의 감각이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


버텨야 한다.


여기서 무너질 순 없다.


그렇게, 의식이 또다시 조각났다.



잠시 후,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뜬 것처럼 의식의 파편들이 떠올랐다. 온몸이 찢기는 듯한 통증이 감각을 지배했다. 피로 물든 기사들의 도륙 난 시체들이 가득했고,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피비린내가 폐부를 찔렀다.


그때, 검은 형체가 기사들의 시체를 밟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여유롭고, 느긋했다.


모르티아. 그녀가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발아래에서 철그럭거리며 갑옷이 짓밟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엘리샤는 이빨이 갈릴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손에 쥔 검이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아직 영혼의 불길은 꺼지지 않았다. 검을 감싸고 타오르는 용의 숨결이 일렁였고, 엘리샤는 마지막 남은 생명을 태워 힘을 끌어모았다.


온 힘을 다해 모르티아를 향해 일격을 날리려 했으나, 칼을 휘두르기도 전에 검은 창들이 무자비하게 날아왔다. 공간을 찢는 듯한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이 꿰뚫렸다.


세 개의 검은 창이 깊숙이 박혔다. 격통이 신경을 태웠고, 힘줄이 끊어진 듯 몸이 경직되었다. 흉부 깊숙이 뜨거운 액체가 차오르며 입안으로 넘어왔다. 그럼에도 엘리샤는 검을 놓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모르티아를 바라보자, 비웃는 듯한 미소가 보였다.


반쯤 일그러진 몸뚱이 위로 드리운 조롱 섞인 흥미. 잔인한 여유. 그리고, 또다시 검은 창이 날아왔다.


명치가 꿰뚫렸다. 근육이 뜯어지는 감각이 온몸을 가득 채웠다. 힘이 빠져나가는 동시에, 피가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촉감이 뚜렷해졌다.


그제야 엘리샤의 몸이 무너졌다.


무릎이 꺾이고, 시야가 흔들렸다. 입 안에서 머물던 액체는 턱을 타고 쏟아졌다. 억지로 정신을 부여잡으려는 그녀의 머리채가 거칠게 붙들렸고, 강제로 고개가 젖혀졌다.


눈앞에는 피가 잔뜩 묻은 가면 아래로 드러난 잔악한 미소가 나타났다. 노골적인 조소와 함께, 마지막 검은 창이 심장을 꿰뚫었다.


감각이 사라지면서 모든 것이 무너졌다.


엘리샤의 의식은 그 순간을 끝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그렇게, 환시의 빛이 꺼졌다.


흩어진 감각이 서서히 되돌아오며 의식이 현실로 끌려왔다. 그러나 세 사람이 함께 돌아온 그 순간에도, 시즈만큼은 여전히 그곳에 묶여 있는 듯했다. 몸을 감싸던 불길한 잔영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듯, 현실과 의식의 경계가 맹렬하게 흔들렸다.


"허윽... 끄흡——"


시즈의 숨이 거칠게 들이켜졌다. 다시 토해내려 했지만 목구멍에서 끊긴 숨이 헛돌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온몸이 여전히 그 순간의 고통을 생생하게 떠올리고 있었다.


살점이 찢기는 감각, 기도 밖으로 쏟아지던 피, 차갑게 얼어붙던 손끝. 모든 것이 사라졌지만, 몸은 아직도 그 고통을 기억하고 있었다. 단순한 공감이 아니었다. 그녀가 겪은 고통이 마치 자신의 살갗을 뚫고 들어온 듯한 착각. 아니, 어쩌면 착각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텐시아의 힘을 이은 자로서, 같은 힘을 지닌 영혼의 공명이 빚어낸 환상통이었으리라.


"무녀님!"


몸이 휘청이는 순간, 아로스의 손길이 시즈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아 주었다.


"무녀님, 괜찮으십니까?"


걱정 어린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손끝이 무언가를 찾듯이 허공을 떨며 더듬었다. 온몸은 창에 꿰뚫린 것처럼 고통스러웠고, 뜨겁게 타들어 가는 작열감이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피가 쏟아져 내렸던 복부, 옆구리, 명치. 그리고 본능적으로, 손이 마지막 순간에 꿰뚫렸던 심장을 더듬었다.


시즈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깊은숨을 들이마시자 손끝의 떨림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리고, 눈앞에 놓인 엘리샤의 시신을 다시 바라보았다.


엘리샤의 마지막 순간이 끝난 후에도, 누구 하나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환시에서 본 광경이 여전히 머릿속을 맴돌았고, 그 처절함은 가슴 깊이 무언가를 새겨 넣었다.


"...누구였을까요."


시즈의 목소리가 정적을 가르듯 퍼져 나가자, 라그나르와 아로스가 시선을 돌렸다. 시즈는 여전히 엘리샤의 시신을, 그녀의 감지 못한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엘리샤 님이 마지막까지 외쳤던 그 말... 누구를 향한 것이었을까요."


푸르게 일렁이는 왼쪽 눈동자는 아직도 환시 속의 장면을 쫓고 있었다. 마치 엘리샤의 의식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듯, 기억을 더듬으며 다시 한번 그 순간을 되새기고 있었다.


라그나르는 깊은숨을 내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살아남은 자일 수도 있겠지요. 혹은, 그녀가 끝까지 지키려 했던 대상일 수도 있고요."


"만약 살아 있다면...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누구도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그 순간, 아로스가 조용히 환시의 등불을 들어 올리며 앞을 가리켰다.


"저길 보십시오."


세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 방향으로 향하자, 환시의 등불이 막다른 벽 너머를 향해 빛을 비추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빛은 벽에 부딪히지 않고 그대로 스며들듯 사라졌다.


"이건......"


시즈가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가까이서 바라보니, 그것은 단단한 벽처럼 보이면서도 어딘가 미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벽의 표면이 어둠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마치 공간 자체가 위장되듯 일렁이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자, 손끝이 벽을 가르듯 그대로 통과했다.


"...어딘가로 이어지는 길이 있어요."


시즈는 망설임 없이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녀의 형체가 부드럽게 벽을 통과하듯 사라졌고, 이어서 라그나르와 아로스도 차례로 그 안으로 들어섰다. 그 너머는 끝없는 어둠이었다. 빛도, 공기의 흐름도 느껴지지 않는 적막한 세계. 생명의 흔적이라고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둠 속 바닥에는 희미한 흔적들이 사방에 남아 있었다.


마치 거대한 뿌리가 뽑혀 나간 자리 같았다. 깊이 새겨진 흉터처럼 바닥이 뜯겨나간 균열은 처음에는 몇 개 보이지 않았지만 점점 늘어나더니 갈수록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 흔적을 따라 걸음을 옮길수록 주변의 어둠은 더욱 깊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균열이 끝나는 자리에서 거대한 공터가 나타났다.


공허한 공간 한가운데, 단 하나의 건축물이 서 있었다.


"...교회?"


시즈가 낮게 중얼거렸다. 나무로 지어진 듯한 교회의 외관은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기이할 정도로 정갈했다. 세월의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채 어둠 속에 홀로 자리 잡은 그 모습은 심연의 어둠 속에 자리하고 있으면서도 묘하게 이질적이었다. 마치 이곳 심연에 속한 듯하면서도, 동시에 동떨어진 듯한 느낌을 자아냈다.


라그나르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교회를 올려다보는 순간, 숨이 멎을 듯한 충격이 온몸을 덮쳤다.


"어째서......"


라그나르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어째서 이곳에 아르보르가......?"


아르보르.


그 이름은 불의 심판과 함께 역사 속에서 지워진 찬란한 고대의 도시였다. 지상에서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던 전설 속의 문명이, 어째서 이 깊고 어두운 심연의 바닥에 잠들어 있는 것일까. 벽을 따라 길게 이어진 기둥들은 간결했고, 돔이나 부조 같은 장식도 없었다. 빛을 받아 반짝이던 다채로운 색깔의 창도 없고, 섬세한 조각도 없었다. 일반적인 신전이나 교회라면 신을 기리는 성상이나 장식물이 있을 법했지만 이곳에는 오직 나무와 차가운 적막만이 남아 있었다. 교회는 분명 아르보르의 건축 양식을 따르고 있었으나 그 옛날 찬란했던 문명의 아름다움은 전혀 없었다.


라그나르는 교회의 내부를 둘러보며 걸음을 멈췄다. 자신이 기억하는 아르보르의 건축물들은 정교한 조각과 웅장한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었지만 이곳에는 그러한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모든 장식을 지워버리고 오직 본질만을 남긴 것처럼, 불필요한 요소가 배제된 금욕적인 공간이었다.


그 사이, 아로스와 시즈는 회랑의 끝으로 시선을 돌렸다. 회랑을 따라 걸음을 옮기자, 공간이 서서히 넓어지면서 시야 끝에서 거대한 목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은 거대한 목상을 보는 순간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멈췄다.


목상의 형상은 어딘가 익숙했다. 묘하게도, 생명의 거인 엘라마를 연상케 하는 여성의 형상이었다. 웅장하거나 위압적인 느낌이 아닌, 어딘가 인자하고도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 그녀는 마치 모든 것을 포용하는 듯한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었으며, 깊이 감긴 눈가에는 어떤 감정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 단순한 숭배의 대상이 아닌 침묵 속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는 존재처럼 보였다.


그 앞으로 누군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드러난 실루엣은 바닥을 뒤덮은 낡은 옷자락과 깊은 고뇌에 잠긴 듯한 자세였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다. 순간의 일렁거림과 함께 나타난 그 형상은, 마치 이곳으로 들어오기 전과 같은 위장 속에 감춰져 있던 듯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무릎을 꿇고 있는 존재의 크기가 예상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무릎을 꿇고 있음에도 시즈의 키를 훌쩍 넘는 거대한 체구였다. 마치 영겁의 시간 동안 그 자세 그대로 화석이 되어버린 듯 살아있는 생명의 기척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무슨 연유인지 오랜 세월 동안 목상의 발치에서 긴 침묵을 하고 있던 듯했다. 바닥부터 몸 전체를 덮고 있는 낡은 로브는 세월의 풍파가 깊이 새겨진 모습이었다. 한쪽으로 큼직하게 찢어져 나간 옷자락에는 연소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맹렬한 불길 속에서 걸어 나온 것처럼 검게 그을린 자국과 헤어진 가장자리를 드러내고 있었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자, 등불 빛에 드러난 그 실체는 더욱 처참했다. 비쩍 마른 육신은 핏기가 사라진 채 메마른 가죽이 앙상한 뼈를 감싸고 있었고, 피부 사이로 드러난 근육조차 말라붙어 버린 지 오래인 듯 보였다. 오래전에 죽어 흙으로 돌아갔어야 했으나 어떤 지독한 이유에서인지 여지껏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머물러 있는 미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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