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국
"놔! 이거 놔라! 당장 놔——!!"
이성을 잃은 절규가 짐승처럼 터져 나왔지만 라그나르는 개의치 않으면서 아로스가 발버둥 치지 못하도록 어깨를 으스러질 듯 단단히 물었다. 그는 앞을 막아서는 용인들의 포위망을 온몸으로 들이받아 뚫어낸 뒤 절벽을 향해 내달렸다.
"안 돼...! 안 돼......!!"
몸부림치는 아로스의 발이 허공에서 처절하게 허우적거렸다. 팔과 주먹을 휘두르며 라그나르로부터 빠져나가려 했지만 늑대 인간의 악력은 강인하고 무자비했다.
라그나르는 있는 힘껏 그를 물고 절벽 끝자락으로 끌고 갔다. 저 멀리 뒤에서 샤비트의 근위병들이 검은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었기에 그는 망설임 없이 절벽 아래로 몸을 던져 뛰어내렸다. 검은 창이 등 뒤로 파고들기 직전, 두 사람의 몸을 스치는 바람 소리가 비명처럼 귓가를 할퀴었다.
"저놈들을 쫓아가라!!"
샤비트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근위대! 놈들을 절대 놓치지 마라!"
라그나르와 아로스는 이미 추격을 아득히 뚫고 절벽 아래를 향해 깊이 내달리는 중이었다. 추격을 뿌리친 두 사람은 절벽 틈에서 갈라져 나온 거대한 뿌리 사이에서 겨우 숨을 고르고 있었다. 아로스가 이를 악문 채 진저리 치듯 라그나르의 입을 밀어내자, 그제야 라그나르는 어깨를 물고 있던 힘을 풀었다.
"왜 막으셨습니까...... 대체 왜......"
아로스는 휘청이며 무릎에 손을 짚었다. 거친 숨이 폐부를 찢을 듯 터져 나왔지만 육체의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오직 지독한 자책감이었다.
파멸의 길로 향하더라도 함께 걷겠다던 그녀의 서약. 그 약속에 고개를 끄덕인 순간, 모든 것이 끝난 것과 다름없었다. 자신이 감히 그녀의 마음에 답했기에 그녀는 비극의 소용돌이로 떨어진 것이다. 그 끔찍한 깨달음은 갈 곳을 잃은 분노가 되었고, 그 모든 원망의 화살을 자신을 막아선 라그나르에게로 돌아갔다.
"구할 수 있었습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대체 왜 막은 겁니까! 왜———"
원망이 가득 담긴 외침과 주먹이 라그나르를 향해 뻗어 나갔다. 하지만 말을 끝맺기도 전에 흙먼지와 함께 뻗어 나간 주먹은 허공에서 멈췄다.
라그나르의 커다란 손이 아로스의 팔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울컥 터진 감정이 주먹에 담겨 있었지만 더는 뻗지 못했다. 되려 양팔을 붙잡힌 채 역으로 힘에 밀려나면서 큰 소리와 함께 벽에 부딪혔다.
"정신 차리십시오! 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목소리에는 칼날 같은 꾸짖음이 섞여 있었다. 그 말에 아로스가 이를 악물고 핏발 서린 눈을 치켜떴다. 그러나 라그나르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으면서 차갑게 시선을 맞받아쳤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 자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신월이 다시 떠오르기 전까지라고 말입니다! 마지막의 신월의 밤은 겨우 이틀 전이었습니다!"
라그나르의 목소리는 순간적으로 터져 나오는 감정을 가르는 돌풍처럼 뻗어 나왔다. 떨리는 그의 손은 여전히 아로스의 팔을 단단히 부여잡고 있었다.
"그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아직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무녀님을 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한마디, 한마디가 마치 등짝을 내리치는 회초리 같았다. 그 안에는 비난이 아닌 겨우 억눌러낸 진심만이 남아 있었다. 아로스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고, 라그나르 또한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손을 천천히 풀었다.
"그러니, 이성의 끈을 놓으시면 안 됩니다. 만약 귀공께서 지금 무너지게 된다면... 무녀님을 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마저 무너지는 겁니다."
아로스의 어깨가 아주 조금 내려앉았다. 굳게 쥐고 있던 주먹도 천천히 풀려갔다. 하지만 여전히 꺼지지 않은 감정의 불씨가 타오르는 눈동자 아래로는 덜 마른 분노와 자책이 번져 흘렀다.
한 달이 채 안 되는 시간.
그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시간조차 모래알처럼 빠르게 흘러내리는 것만 같았다. 놈들은 대체 어디로 그녀를 끌고 간 것인가. 다음 신월이 뜨기 전에 정말로 구할 수는 있는 걸까. 자신이 구하러 가기 전까지 무사할까. 불안과 절망이 뒤엉킨 채, 온갖 상념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그때였다. 절벽 위, 바람을 찢고 날카로운 외침이 울렸다.
"저기 있다! 놓치지 마라!"
샤비트의 근위대와 용인들이 나타났다. 검은 실루엣이 밀물처럼 덮쳐오는 동시에 곧장 화살들이 빗발치면서 머리 위로 쏟아졌다. 수십 발의 화살촉이 공기를 갈라 두 사람 머리 위의 뿌리와 바위틈에 박히더니 네 마리의 용인들이 고개를 쳐들고 화염을 내뿜었다. 폭발하듯 터져 나온 용의 숨결은 건조한 절벽 언저리를 주홍빛 불길로 휩쓸었다.
뒤이어서 하늘을 가르며 내려온 또 다른 용인들의 거대한 몸체가 절벽을 가로지르며 아로스와 라그나르가 딛고 있는 뿌리를 단숨에 박살 내버렸다. 거대한 충격에 두 사람의 몸이 갈라지듯 분리되었다. 뿌리를 지탱하던 바위가 통째로 무너지면서 아로스의 몸이 중심을 잃고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귀공! 제 손을——"
라그나르가 뒤늦게 손을 뻗었지만 이미 늦어버린 직후였다. 아로스는 순식간에 무너진 대지의 틈 사이, 영겁의 세월 동안 바닥을 가득 메운 안갯속으로 사라졌다.
홀로 남은 라그나르를 향해 용인들이 날아들며 절벽을 뒤덮기 시작했다. 근위대들은 모든 곳을 둘러싸면서 포위망을 점점 좁혀갔다.
"놓쳐선 안된다! 반드시 놈들을 잡아 죽여라!"
굉음처럼 메아리치치는 샤비트의 외침 속에서 라그나르는 이를 갈며 방향을 틀어 물러섰다. 머리 위로는 그림자들의 암영이 깔렸고, 앞으로는 불의 열기와 무수한 날개들이 시야를 덮쳤다.
지금은... 도저히 아로스를 구하러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매캐한 연기로 뒤덮인 작은 공간은 피와 철, 살점이 구워진 냄새로 가득했다. 마른 피가 얼룩처럼 새겨진 검붉은 돌로 쌓인 벽면의 틈 사이에는 찢겨나간 살점의 흔적이 곳곳에 스며 있었다.
데미안의 손은 위로 들린 채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 무릎은 피와 땀으로 젖은 바닥 위에 짓눌려 있었고, 상반신은 이미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너덜너덜했다. 메마른 땅처럼 갈라진 등줄기 위로는 붉게 터진 살점과 깊은 상처가 얼룩처럼 새겨져 있었다. 단순한 채찍질의 결과가 아니었다. 불의 심판으로 추락한 반역한 자들에게 사용됐던 고대의 채찍. 사자들조차 벌벌 떨게 했던 그 고문도구가, 지금 베리엘의 손에 들려 있었다.
검은 깃털로 덮인 팔뚝 아래서 채찍이 비명처럼 끌렸다. 길게 늘어진 채찍의 가죽 안쪽으로는 금속과 섬유가, 겉으로는 불길하게 떨리는 붉은 신경의 줄기들과 미세한 수천 개의 칼날들이 얽혀 있었다. 가늘게 엮여있는 끝부분은 마치 살아 있는 촉수처럼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짜아악———
채찍이 데미안의 등 위를 무자비하게 강타했다. 공기가 갈라지면서 순간적으로 뼈마디가 덜컹거리는 듯한 충격음이 울렸다. 또다시 피가 튀고 살점이 터져나가는 동시에 그의 팔목을 채운 쇠사슬이 흔들렸다.
"끄윽...... 으으으으윽......!"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데미안은 이를 악물며 참았다. 허리께에서 미세하게 떨림이 올라왔지만 고개는 단 한 번도 아래로 꺾이지 않았다.
"...끈질기게도 버티는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궁금해지는구나."
베리엘은 조용히 채찍을 말았다가 다시 쥐었다.
그리고, 두 번째.
짜아아악————
살가죽이 길게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데미안의 몸이 그대로 덜컥 앞으로 쏠렸다.
사슬이 절그럭거렸다. 무너지는 몸을 버티기 위해 쓰러지지 않으려 애썼지만 힘이 빠져버린 무릎은 끝내 아래로 미끄러졌다. 상반신이 허공에서 흔들렸고, 동시에 고통이 눈앞을 번쩍일 만큼 밀려들었다.
"크으윽...... 흐아아아악......!"
처음으로 억눌렀던 고통이 입 밖으로 터졌다. 그 울음은 인간적인 절규와 야수의 고함 사이를 헤맸다.
조용히 채찍을 내려놓은 베리엘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고문실 옆편에 자리하고 있던 쇳덩이가 가득 담긴 화구에서 인두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일반적인 불로 달군 것이 아닌 베리엘이 가장 증오하는 신의 힘, 바트라의 불꽃에 달궈져 고유의 인장을 지닌 고문도구였다. 화구 바닥 아래에는 멸망한 문명 아르보르의 고대어가 새겨진 문양이 은은히 빛을 발했다. 그가 인두를 꺼내 들자, 작은 철조각에서부터도 불꽃의 맥이 사방으로 튀었다.
데미안이 고개를 들자, 핏발이 잔뜩 선 눈동자가 인두를 향하면서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것까지 꺼내려는 건가."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지만, 그의 말투는 조롱에 가까웠다.
"내가...... 하아...... 참지 못할 거라...... 생각하나?"
"아니. 네놈이 못 참는 게 뭔지 알고 싶어서 말이지."
베리엘은 무표정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살점이 깊게 패인 어깨 상단에 인두를 갖다 댔다.
치이이이익———
"끄으아아아아아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지금껏 버텨왔던 모든 고통이 한순간에 폭발했다. 사지가 덜컥이며 경련했고, 필사적으로 온몸을 뒤틀며 저항했다. 그러나 신의 불꽃이 새겨진 인두는 무자비하게 살을 태우는 동시에 뼛속까지 침투했다.
"나의 조상들이 받았던 고문의 방식 중 하나지. 그 불이 어떤 고통을 주었는지 몸으로 직접 겪어보니 어떠냐. 그들의 고통이 어땟을지 이제는 실감이 좀 되나?"
"끄읍...... 네... 네놈이 감히...... 그 불을 손에 쥐다니......!"
"가증스럽나? 역사 속에서마저 잊혀진 죄인의 후손 따위가 너희 신의 불을 쓰는 것이 말이야. 하지만 그 불로 네놈의 정신을 꺾을 수만 있다면, 그것만큼 통쾌한 일도 없을 테지."
베리엘은 데미안의 몸을 지졌던 인두를 내려놓으며 경멸이 담긴 웃음과 함께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꽤나 감탄했다. 충직한 개처럼 고분고분하게 굴던 네놈의 모습은 실로 대단했어. 다른 멍청한 사제 놈들이 내 손에 놀아나는 꼴을 보며 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을지 정말 궁금해."
그의 말에 데미안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 위로, 충격에 휩싸인 눈동자가 베리엘을 향했다.
"상이라도 줘야 할 연기력이었다. 물론... 지금부터 내가 내릴 상이 네놈 마음에 들지는 모르겠다만."
베리엘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는 고문실 한편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꺼내 든 무언가를 손에 들었다. 그 물건은 명확한 형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암녹빛 안개가 소용돌이치는 그 덩어리는, 마치 오래전 불의 심판으로 추락했다는 신의 부서진 잔재 같았다. 형상도, 기운도, 감촉도 현실에 속하지 않는 의문의 파편과도 같은 그것은 고문실의 공기를 기괴하게 비틀기 시작했다.
"채찍도 버텼고, 불꽃마저도 견뎠겠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네놈의 안쪽에서부터 태워볼까?"
그 불길한 덩어리가 데미안의 이마에 닿는 순간, 눈동자가 뒤집힐 듯 흔들렸다. 바닥 아래로 침전되는 듯한 의식. 휘몰아치는 잿빛 파도와도 같은 기억의 분열.
피투성이가 된 바닥 위에 노아가 쓰러져 있었다. 진홍빛 화염에 휩싸여 쓰러진 채, 마지막까지 손을 뻗은 어린 동생. 노아의 입술은 불꽃 속에서 부르튼 채로, 숨이 끊어지는 와중에도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형... 왜 나를... 버린 거야...? 어째서......?'
"......아... 아니야... 나는... 나는, 널 버린 적이 없어......!"
데미안의 입에서 처음으로 부정의 속삭임이 터졌다. 그의 눈동자가 넓게 열리면서 갈 곳을 잃은 듯이 요동쳤다. 현실의 고문보다 더 깊은 고통이 머릿속 장면에 있었다.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선명하게 그 순간의 감정이, 열기가, 그리고 시선이 느껴졌다. 데미안은 지금 현실이 아닌 만들어진 내면의 의식 속에서 고통받고 있었다.
"네놈들의 신은 끝끝내 너희들에게 답을 주지 않았지. 하지만... 그 잔재는 네가 살아남은 이유를, 그리고... 네놈이 '지키고자' 하는 것들을 무참히 부숴버릴 것이다."
조용히 눈을 내리깔은 베리엘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데미안의 귓가를 속삭였다.
"......믿지 않아도 괜찮아. 믿음조차 사라진 채로 정신이 무너진다면... 그보다 절망스러운 것도 없을 테니까."
데미안의 몸이 천천히 떨리기 시작했다. 온몸을 떨면서도 저항하려 했지만, 내면 안쪽 어딘가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금이 간 유리가 조각나듯 소리 없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그의 굳건했던 정신에 결코 아물 수 없는 균열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의 불꽃은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지만, 불은 점점 '무엇을 위해' 타야 하는지를 잊어가고 있었다. 한때는 동생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타올랐던 불꽃은, 이제 거짓된 기억의 재로 뒤덮이며 희미하게 사그라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