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동행, 그리고 작별
어둠이 느릿하게 물러나자, 희미한 여명이 하늘의 가장자리를 붉고 은은한 빛으로 물들였다. 서서히 드러나는 하늘빛 아래의 교회 주변은 한낮의 적막보다 더 깊은 고요 속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이른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몇몇 병사들은 일찍부터 깨어나 노아와 아마룬의 출발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준비 됐나?"
아마룬의 목소리가 새벽 공기 속에 울려 퍼졌다. 깊고도 낮게 깔린 그 음성은 잠든 땅을 두드리는 북소리처럼 묵직하게 마음을 울렸다. 거대한 손에 들린 도끼는 강철의 날카로움과 동시에 긴 세월을 함께 견뎌낸 무거운 책임을 품고 있었고, 수선된 갑옷은 칼날처럼 날 선 에메랄드빛을 반사하며 단단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노아는 그런 아마룬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엔 새로운 여정 앞에서의 긴장과 다짐이 엷게 드리워져 있었다.
"네. 준비 끝났습니다."
시즈와 아로스는 조용히 교회 문 앞에 서 있었다. 떠나는 이들을 위해 이른 새벽부터 준비를 마친 그들의 모습은 담담했지만, 미세한 떨림이 눈빛 아래 숨어 있었다. 시즈는 손에 쥔 작은 두루마리를 노아에게 조심스럽게 건넸다. 그것은 그녀가 직접 작성한 기도문으로, 그 속에는 무사 귀환을 바라는 마음과 함께 무언의 축복이 담겨 있었다.
"지금의 저를 있게 해 준 기도문이에요.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펼쳐 보시면 마음을 다잡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당신이 어디에 있든, 저희가 기도하고 있다는 걸 잊지 마세요."
노아는 두루마리를 받아 들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 속에 담긴 마음의 무게를 느끼려는 듯 손끝이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리고 이내 입꼬리를 천천히 들어 올리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무녀님. 정말 많은 걸 받기만 하고 떠나는 것 같네요."
목소리에는 조금의 쑥스러움과 함께 진심 어린 고마움이 묻어 있었다. 시즈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부드러운 미소로 노아를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아요. 지금 떠나는 여정도 저희가 이어갈 길에 큰 영감이 될 테니까요. 그동안 여정의 한 조각을 함께 나눈 것만으로도 저희는 충분히 받은 거예요."
"하하, 그런가요."
노아는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행동은 긴장 속에서의 작은 해소처럼 보였고, 떠나는 이와 남는 이 사이의 무게가 조금 가벼워진 듯했다.
"잠깐."
아마룬의 낮고 무게감 있는 목소리가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온 그는 갑주 한 점을 아로스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왼쪽 어깨를 감싸는 갑주였고, 금속의 표면은 정제된 달빛을 머금은 듯 은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면 그 위에는 섬세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으며, 중심에는 타오르듯 청록색이 번지는 듯한 작은 원석이 박혀 있었다.
"선물이다. 처음 봤을 때부터 왼쪽이 휑해서 마음에 걸리더군. 굴러다니는 걸 주워다가 대충 만들었다. 시간이 없어서 다른 부위까지 새로 만들지는 못했지만... 별수 있나. 아무튼, 지금 착용해도 문제없을 거다."
아로스는 조용히 갑주를 받아 들고 왼쪽 어깨에 올렸다. 가죽으로 덧댄 어깨에 갑주를 고정시키자, 마치 원래 그의 일부였던 것처럼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거인의 손길이 깃든 물건은 견고하면서도 정교했고, 투박한 외피 너머로 그의 세심한 배려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로스는 말없이 깊이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첫 대면은 살벌했지만... 지나간 일이니 덮는 걸로 해두지. 그리고 거기 무녀. 그동안 무례한 태도를 보인 것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사과한다. 하지만 네가 믿는 그... 아니다.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지."
아마룬이 마지막 말을 삼키며 어색한 기색으로 고개를 돌렸고, 시즈는 그의 쑥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며 애써 웃음을 참았다. 거인의 커다란 몸집과 투박하고도 위압감 있는 외모가 부끄러워하는 표정과 대비를 이루며, 어딘지 모르게 인간적인 면을 풍기고 있었다.
"사과를 받아들이겠습니다."
말을 마친 시즈는 잠시 망설이다가, 문득 조심스레 물었다.
"여쭤볼 게 있습니다. 혹시... 최근 타리안에 대한 소식을 들으신 적 있으신가요? 곧 그곳으로 향해야 하는데, 저희가 아는 건 15년 전 전쟁의 여신께서 마지막을 맞이하셨다는 것뿐이라... 그 외엔 아는 것이 없습니다."
아마룬은 짧게 숨을 내쉬고,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타리안이 어떤 상태인지는 나도 모른다. 전쟁의 여신이 쓰러진 이후로 고립되었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지. 당연히 온전할 리는 없을 테고... 더군다나, 이곳 시스테나 전선까지 파도의 악마들이 몰려왔다는 것은 평원의 방패라 불렸던 타리안이 뚫렸다는 말이니까."
시즈의 낯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지자, 아마룬은 곧 무겁던 어조를 조금 풀며 덧붙였다.
"그렇다고 해서 타리안이 완전히 무너졌다고 보긴 어렵다. 그곳은 여신의 결계가 남아 있는 땅이야. 아직까지도 누군가는 그곳을 지키고 있을 거다."
아마룬은 뭔가 떠오른 듯 시선을 다시 시즈에게 돌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타리안에는 아주 나이가 많은 전사가 한 명 있다. 전쟁의 여신과 함께 오랜 세월을 보냈고, 나보다도 훨씬 더 깊은 시간을 살아온 존재다. 아마 그에게서 너희가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분의 이름이...?"
"라그나르. 보자마자 바로 느낌이 올 거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마음을 조금은 준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시즈의 진심 어린 대답에 아마룬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뒤 말을 아끼듯 시선을 피했다. 아직까지는 그에게 있어서 감정 표현은 여전히 낯선 일이었다. 천천히 몸을 돌리며 불꽃 방책을 바라보던 그가 걸음을 떼려는 순간, 노아가 시즈와 아로스를 번갈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중에 다시 뵐 수 있을까요?"
시즈는 살짝 웃으며 짧게 대답했다.
"그럼요. 분명 다시 만날 날이 올 거예요."
그 말에 노아는 살짝 입꼬리를 올렸고, 옆에 서 있던 아로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짧은 동작 하나에도 미묘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노아는 마지막으로 두 사람을 향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말은 없었지만 또렷한 작별의 뜻이 담긴 인사였다.
"자, 그럼 출발해 볼까."
아마룬이 나직하게 말하며 노아를 번쩍 들어 올렸다. 갑작스럽게 두 발이 땅에서 떨어지자, 노아는 움찔하며 두 팔을 허우적거렸다.
"잠, 잠깐만요! 너무 높— 으아아!"
겨우 균형을 잡은 노아는 급히 가방에서 밧줄을 꺼내 자신과 아마룬의 손가락을 몇 차례 감싸 묶기 시작했다. 서툴렀지만 필사적인 손놀림 덕에 매듭은 단단히 고정되었다.
"준비됐어요! ...아마도요."
그 말에 아마룬은 코웃음을 치듯 짧게 한숨을 내뱉고는, 시선을 전선 쪽으로 돌렸다. 잠시 침묵하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대지의 어머니께서 이 땅에 남은 모든 이들을 지켜주시길."
말은 짧았지만, 그 속에는 여운이 있었다. 거인의 낮고 깊은 음성이 정적을 가르듯 퍼져 나가자 전선에 남은 병사들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이며 그 축복을 받았다.
작별 인사를 마친 아마룬은 천천히 불의 장벽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거대한 손을 들어 올려 노아를 가볍게 품에 안았다. 그 동작은 단순한 탑승이 아닌 외부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감싸겠다는 몸짓에 가까웠다.
"떨어지면 그대로 죽으니 꽉 잡아라."
"알겠습니다!"
노아의 대답을 끝으로, 아마룬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북쪽을 향해 돌진했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악———!"
노아의 비명은 전선을 가로질러 퍼졌고, 병사들의 입가에는 짧은 웃음과 걱정 어린 표정이 번졌다. 아마룬이 질주하자 파도의 악마들은 그의 다리에 부딪혀 걸레짝처럼 떨어져 나갔다. 노아는 그의 손에 매달려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으며 불꽃을 퍼부었고, 놈들은 아마룬의 허벅지 이상을 기어오르지 못한 채 불에 타면서 쓰러졌다.
거인이 달려 나간 자리는 부패와 독기가 연기처럼 흩어졌다.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던 병사들은 마치 사막 끝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을 맞은 듯 가슴 깊은 곳에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불꽃의 잔영을 가르며 질주하던 아마룬과 노아는 이내 평원 너머로 사라졌다. 잔열만이 공기 속에 남아, 그들의 흔적을 따라 조용히 일렁였다.
"정말 떠났네요..."
시즈가 지평선을 바라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눈빛에는 걱정과 아쉬움이 함께 묻어 있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지금 이 세상에서 노아보다 안전한 사람은 없을 겁니다."
아로스가 무표정하게 말하자, 시즈도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웃었다.
"정말 그러네요. 신과 용이 아닌 이상 거인의 보호를 받는 사람을 건드릴 이는 없겠죠."
잠시 안도의 숨을 내쉰 그녀는 이내 표정을 고쳐 잡고 병사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걱정을 뒤로한 채, 이제는 남아 있는 일들에 집중할 때였다.
"여러분은 앞으로 어떻게 하실 계획인가요?"
시즈의 질문에 한 기사가 앞으로 나섰다. 피로가 짙게 깔린 얼굴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흔들리지 않았다.
"두 분도 아시겠지만, 시스테나 전선은 더 이상 방어선 역할을 수행하기 어렵습니다. 병력은 크게 줄었고, 공성 병기들은 심각하게 훼손됐습니다. 재건을 시도하더라도 인원 부족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오래 버티기 힘들 겁니다."
기사는 말을 잠시 멈췄다가 덧붙였다.
"현실적인 방안은 남쪽으로 철수해 병력을 재정비하거나, 후방에 새로운 방어선을 세우는 것뿐입니다."
"결국 그 방법뿐이군요..."
시즈가 낮게 중얼거리듯 말하자, 기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가장 염려되는 건... 파도의 악마들이 언제 다시 몰려오느냐입니다. 추측일 뿐이지만, 놈들의 출현 주기를 정리한 기록이 하나 있습니다. 어젯밤의 공격은 거의 반년의 주기가 한꺼번에 터진 듯한 규모였죠. 만약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이들을 끌어낸 것이라면... 최소한 5개월 정도는 유예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 시간 동안 저희는 가능한 모든 대비책을 마련할 예정입니다."
기사의 간결하면서도 철저한 설명은 아로스의 눈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들고 물었다.
"귀하의 이름을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하멜'입니다."
"하멜. 그렇군요."
아로스는 잠시 말끝을 멈추고, 주위의 병사들을 둘러보았다. 피로와 상실감에 젖은 눈들이 조용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들에게는 당신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부담이 클 수 있다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다이크께서 살아계셨다면 분명 저와 같은 부탁을 하셨을 겁니다."
하멜은 눈을 내리깔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짧은 숨을 내쉰 뒤,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부족한 점이 많겠지만, 제가 남은 병사들을 이끌겠습니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겠습니다."
아로스는 그의 대답을 듣고 미소를 짓지는 않았지만, 눈빛만큼은 부드럽게 변했다.
"쉽지 않은 길이겠지만, 해내실 수 있을 겁니다."
하멜은 그 말에 짧게 고개를 숙였다. 한순간 전장의 소음이 멀게 느껴졌고, 그들은 말없이 마주 선 채 잠시 감정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하멜이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그럼... 두 분께서도 이제 떠나시는 겁니까?"
시즈가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더 늦기 전에, 저희도 타리안으로 향해야 합니다."
"그렇군요..."
하멜은 둘을 번갈아 바라보다, 이내 말없이 시선을 떨구었다. 그러곤 천천히 고개를 들며 눈빛을 바로 세우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두 분과 함께한 시간은 제게도 큰 의미였습니다. 부디, 무사히 여정을 이어가시길 기원하겠습니다."
아로스는 짧게 목례하며 그 말에 답했다. 시즈 역시 미소를 지으며 하멜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나아갈 길에... 아텐시아의 축복이 함께하길 바랍니다."
그 한마디에 시즈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더 많은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말이 길어지면 마음이 흔들릴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레클레스와 다리아에 올라탔다. 시즈는 말의 고삐를 다잡은 뒤 마지막으로 몸을 돌려, 남은 병사들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여러분의 헌신과 용기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아텐시아의 지혜가, 언제까지나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시즈의 말을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북쪽을 향해 천천히 말을 몰기 시작했다.
타리안으로 이어지는 길은 믿기 어려울 만큼 깨끗했다. 조금 전까지 부패와 독기로 가득했던 대지엔 검보랏빛 흔적 하나 남지 않았고, 바닥에는 맑은 이슬이 흩어져 아침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마치 길 전체가 한 번 숨을 들이쉰 뒤 새로 태어난 듯한 느낌이었다. 그 정화된 대지 위로 뻗은 길 위로 아로스의 시선이 머무르고 있었다.
"단순한 우연일까요?"
그의 물음에, 시즈는 조용히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그렇더라도... 믿고 싶어요. 저희가 잘 나아가고 있다는 걸요."
두 사람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조용히 북쪽으로 향했다.
희미한 안개와 아침 햇살이 교차하는 풍경 속에서, 타리안으로 이어지는 여정은 끝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두 사람이 떠난 자리에는 하멜과 병사들이 남았다. 남겨진 그들의 뒷모습은 떠나는 이들에게 또 다른 기약 없는 작별의 잔상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