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신과 늑대 (4)

오래된 증오

by 이샤라

"그 짐승이... 아직도 살아있다고?"


바르그.


그 늑대는, 15년 전 모르티아가 수십 개의 창으로 찔러 쓰러뜨렸던 존재였다.


죽었다고 확신했다. 아니, 죽어야 했다. 그건 단순한 전투가 아닌 복수였고, 그 치명상은 모든 걸 끝낸 증거여야 했다. 그런데... 아직 살아 있다고?


모르티아의 손끝이 무의식중에 떨리자, 그리즈마는 그 반응을 조용히 즐겼다.


"역시 그랬군. 너도 그 늑대에게 꽤나 강렬한 감정을 품고 있었던 모양인가. 흥미로운걸."


모르티아는 대꾸하지 않았다. 가면 아래의 눈빛은 차가운 어둠에 잠겨 있었다. 심연의 중심부, 그 적막한 공간 속에서 두 존재만이 고요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아무튼 살아 있더군. 네가 놈을 그렇게 만들어 놓지 않았나? 지상에서 쓰는 말로 하자면... '고슴도치'로 만들어 놨다지."


모르티아의 턱이 굳어졌다. 이를 악무는 소리가 작게 새어 나오면서 가면 아래의 눈동자는 불길처럼 번뜩였다. 그날 모든 것을 끝냈다고 믿었다. 전쟁의 여신 카야와 그녀의 충실한 동반자 바르그. 같은 날, 같은 전장에서 쓰러뜨렸으니 그것은 승리가 아닌 '복수'이자 처형이었다. 그런데 그 짐승이 아직도 살아 있다니....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과거의 치욕이 다시 되살아나고 있었다.


짧은 숨을 내쉰 모르티아는 가슴 속에서 피어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하지만 아직 지상에 나설 수 없는 몸이었던 그녀는 생각을 바꿨다. 즐거움을 찾는 그리즈마에게 그 짐승을 미끼로 던져주기로.


"그렇게 몸이 근질근질하다면, 그 늑대와 한판 붙어보는 건 어때? 나쁘지 않을 텐데 말이지."


"겨우 숨만 붙어 있는 짐승을 상대로? 대체 뭐가 재미있다는 거지."


"네놈 생각과는 다를걸. 예전만 못해도, 널 물어뜯을 만한 이빨쯤은 남아 있어. 물론 네가 질 일은 없겠지만... 사실 패배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지."


"웃기는군. 네가 직접 처리하지 않는 이유가 뭐지?"


"난 아직 지상으로 올라갈 수 없잖아. 그래서 너에게 유흥거리를 주는 셈이지. 늑대를 처리하면 네 시간도 즐거워지고, 내 계획도 깔끔해지니까. 서로 좋은 거 아니겠어?"


그리즈마는 한 손을 턱에 갖다 댄 채 잠시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이내 찢어진 입을 비틀며 웃었다.


"생각해보니, 다 죽어가는 놈을 직접 죽이는 건 별로 재미없군. 차라리... 예전에 버려둔 자식들을 써먹는 게 낫겠어."


그의 말에 모르티아는 가면 아래서 피식 웃었다. '버려둔 자식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지상 어딘가에 흩뿌려 두었던 그리즈마의 피가 섞여 태어난 이형들. 그는 때때로 직접 손을 더럽히기보다는 그들을 도구처럼 부리는 걸 더 즐겼다.


"늪으로 간다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였나? 그 더러운 짐승들이 아직도 남아있을 거라 생각하니 어이가 없군. 항상 느끼지만 네놈의 취향은 고약하기 짝이 없어."


모르티아가 차갑게 쏘아붙이자, 그리즈마 또한 코웃음을 치며 맞받아쳤다.


"하! 너라고 별반 다를게 있나?. 지상에서 굴러떨어진 뒤로 하루 종일 뿌리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주제에... 누굴 평가하나?"


대답을 끝으로 그리즈마의 형체가 천천히 심연 속 어둠으로 사라지자, 모르티아는 그제야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다시금 고요하게 고독이 자신을 감싸자, 손에 쥐고 있던 검은 뿌리 조각을 바닥에 내려두었다. 천천히 일어선 그녀의 시선이 뿌리 너머를 가로질렀다. 그 너머에는 언제나처럼, 아무것도 없었다. 모르티아는 고새를 살짝 들어올린 채 낮게 중얼거렸다.


"자매여... 네가 살아서 내 원대한 계획을 목도하지 못한다는건 참으로 유감이야. 하지만, 네 흔적조차 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진다면... 그것이야말로 더 없는 완벽함이겠지.".




달빛이 짙은 안개를 뚫고 창문 너머로 희미하게 스며들었다. 방 안은 어스름한 회색빛에 잠겨 있었고, 공기는 여전히 밤의 흔적을 품은 듯 서늘했다. 아로스는 의자에 앉은 채 잠들지 않는 눈으로 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시선은 창밖의 어둠을 꿰뚫었고, 들리는 것은 시즈의 고른 숨소리뿐이었다. 창문 너머 풍경은 지워지지 않는 안개와 흐릿한 별빛이 얽힌 채 정적 속에 서성이고 있었다.


작은 움직임이 그의 시선을 돌려놓았다. 시즈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올렸다. 약간 놀란듯한 표정이었지만, 그녀는 미소로 아로스를 맞았다.


"편안히 주무셨습니까."


"네... 저도 모르게 너무 깊이 잠들었네요. 그동안 정말 무리했나 봐요."


"그러셔도 괜찮습니다. 무녀님이 편히 쉬셔야 저도 안심할 수 있으니까요."


잠시 뒤, 조용한 발걸음이 복도를 타고 다가왔다. 노크와 함께 방문을 연것은 라그나르였다. 걸음은 배려가 깃들어 있었고 눈빛은 안부를 대신했지만,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본 그의 시선은 살짝 당황한 듯한 모습이었다.


"...아, 제가 결례를 범했군요."


라그나르는 시즈를 향해 고개를 약간 숙이며 말을 이었다.


"이곳 타리안은 남녀의 구분에 얽매이지 않는 문화라...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무녀님의 신분을 미처 고려하지 못했군요."


하지만 시즈는 개의치 않다는 듯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괜찮습니다. 라그나르 경 덕분에 정말 편히 쉴 수 있었는데요."


"그리 말씀해주시니 다행이군요. 다만... 하루를 꼬박 주무실 줄은 저도 미처 예상치 못했습니다."


시즈는 머쓱한 표정으로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오래 잤나요?"


라그나르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뒤, 마저 이야기했다.


"괜찮으시다면, 식사를 하신 뒤에 요새 위로 올라와 주셨으면 좋겠군요. 두 분께 보여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는 문 밖에서 대기하던 검은 늑대들에게 짧은 손짓을 보낸 후, 말없이 방문을 닫고 떠났다. 조용히 사라진 라그나르의 떠난 자리를 바라보던 시즈는 아로스를 향해 고개를 돌려 조심스럽게 물었다.


"...귀공, 제가 도대체 몇 시간이나 자고 있었나요?"


"스무 시간은 넘겼습니다."


창밖을 바라본 시즈는 짧은 한 마디를 내뱉었다.


"......앞으로는 체력 단련이 필요하겠네요."



한 시간 뒤, 두 사람은 수인들의 자연스러운 호위를 받으며 타리안 요새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성벽 위로 이어지는 계단에 발을 디디자, 강철이 울리면서 발소리가 리드미컬하게 반향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갈수록 공기는 점점 더 차가워졌고, 요새의 위용은 점점 더 강렬하게 다가왔다.


마침내 두 사람은 타리안의 성벽 위에 도착했다. 라그나르는 이미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말없이 손을 들어 성 밖을 가리켰고, 짧은 한 마디가 뒤따랐다.


"주변을 한번 둘러보시지요."


그의 말에 따라 성 밖을 바라보는 순간, 두 사람의 얼굴에 어둠이 스쳤다. 요새 밖으로 펼쳐진 풍경은 참사에 가까웠다.


멀리 북쪽 하늘은 별빛조차 사라진 암흑에 잠겨 있었다. 어둠은 단순한 밤의 장막이 아니었다. 그것은 카노라스에서 피어오른 검은 기운이었으며, 마치 세상을 집어삼키려는 거대한 포식자의 숨결처럼 보였다. 아로스의 시선이 더 먼 북쪽을 향하자 붉은 형상이 어슴푸레 모습을 드러냈다.


불길이었다. 지평선 끝에서 피어오르는 거대한 불의 장벽. 차가운 어둠을 밀어내듯 타오로는 불길은 마치 대지와 하늘 사이에 선 하나의 경계선처럼 느껴졌다.


"저것이... 소문으로만 듣던 불의 장벽이로군요."


시즈의 중얼거림처럼 낮은 목소리가 퍼졌다. 거리는 아득했지만, 불길은 압도적인 존재감을 지닌 채 지평선을 할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시즈의 시선이 잠시 흔들렸다. 저 불길 너머... 이그니카로 향한 노아는 무사할까. 아마룬이 무사히 그를 지켜줄 수 있을까.


그리고 잠시 뒤, 요새 주위를 둘러보던 두 사람에게 라그나르가 입을 열었다.


"이곳 타리안은, 과거 태고의 전쟁 당시 신들의 최후의 전선이었습니다. 연합한 거인과 용들의 힘은 필멸자들의 상식을 아득하게 초월했지요. 바람 앞의 등불 같았던 신들이었지만, 우리의 주군이자 전쟁의 여신이신 카야께서는 물러섬 없이 최전방을 지키셨습니다. 그 분의 지휘 아래 남쪽 땅은 끝내 무너지지 않았고, 이후 신들은 일부 거인과 용의 힘을 빌려 적들을 북방으로 몰아냈습니다. 패배한 자들은 혹한의 땅으로 쫓겨났고, 이곳은 '평원의 방패'라는 뜻으로 타리안이라 불리게 되었지요."


라그나르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는 끝없는 존경과 비애가 함께 침잠해 있었다. 단지 오래된 신화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것은 이곳 땅이 여전히 품고 있는 전쟁의 서사이자 피로 쓰인 진실의 조각이었다.


아로스는 라그나르의 말을 들으며 머릿속으로 과거의 전장을 그려보았다. 거인의 발걸음으로 대지가 울리고 용들의 숨결이 하늘을 불태우던 광경. 그리고 그 혼돈의 전장 한복판에 선 전쟁의 여신 카야의 형상이 아득하게 떠올랐다. 그녀는 단순한 신이 아닌 역사의 무게를 온몸으로 버틴 전사 그 자체였으리라.


시선은 자연스럽게 요새 중심부를 향했다. 허물어진 강철벽과 침식된 구조물들. 형태는 바래졌지만, 그 안에 새겨진 이야기들은 아직도 가라앉지 못한 채 속삭이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요새의 바깥 아래쪽에서 아주 미세하게 반짝이는 것이 아로스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저곳에......"


무의식중에 중얼거리자. 시즈도 아로스의 시선을 따라갔다.


"뭔가 발견하신 건가요?"


"......누군가, 저기에 있습니다."


전날 요새로 오는 길에서 보았던 거대한 늑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웅크린 채 누워 있었다. 하지만 움직임 없는 그 품속에는 어렴풋이 누군가의 형체 하나가 쓰러져 있었다. 빛에 반사된 희미한 윤곽만이 그 존재를 드러낼 뿐, 더 이상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어서 시즈의 시선이 늑대와 요새 사이의 대지 한가운데에서 멈췄다. 그곳에는 거대한 검 하나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대검의 형상은 낯설지 않았다. 도시 중심부의 석상, 전쟁의 여신이 손에 쥐고 있던 바로 그 대검이었다.


"여신의 대검이... 왜 저곳에 있는 거죠?"


라그나르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성벽 너머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싸움을 견뎌낸 전사의 눈이었다. 하지만 그 깊은 침묵 속에는 오래 묻어둔 상실과 분노가 엉켜 있었다.


천천히 몸을 돌린 라그나르는 아로스와 시즈를 향해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이곳이 걸어온 과거를 보여드리겠습니다. 환시의 등불을 잠시 제게 맡겨주시겠습니까."


라그나르가 조용히 손을 내밀자, 잠시 주저하던 아로스는 조심스레 품에서 등불을 꺼내 그의 손 위에 올려주었다. 희미한 빛이 손바닥 위에서 조용히 깜빡였고, 휘청이듯 기울던 빛은 어느새 숨을 쉬는 것처럼 맥동하며 형상을 빚어냈다. 한 겹의 막처럼 의식 속의 공간이 흔들리면서 세 사람의 시야는 불빛을 따라 조용히 전환되었다.


환시의 등불이 비춘 장면은 라그나르의 기억 속이었다. 군데군데 윤곽이 흐릿했지만 상황은 또렷이 가늠할 수 있었다.


검은 늑대들의 무리가 평원을 가르며 달리고 있었다. 선두에는 라그나르가 있었으며, 그 뒤로는 칠흑빛 갑옷을 입은 타리안의 정예 전사들이 소리없는 결기로 따라붙었다. 그들은 타리안 요새를 등진 채 위기에 빠진 카노라스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라그나르의 눈에 전장의 중심이 들어왔다. 소용돌이치는 검은 안개 속에서 수없이 몰려든 파도의 악마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존재가 있었다.


타리안의 수호신이자, 전쟁의 여신 카야. 그 옆에는 성채 앞에서 봤던 거대한 늑대 바르그가 함께하고 있었다. 두 존재는 마치 등을 맞댄 듯, 서로의 빈틈을 메우며 모든 것을 헤쳐나가는 듯한 영혼의 동반자처럼 전장을 가르고 있었다.


카야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파도의 악마들은 갈기갈기 찢겨 나갔고, 거대한 늑대는 눈 앞의 모든 것들을 물어 뜯으며 길을 열었다. 그들의 발 아래에는 이미 셀 수 없이 많은 괴물들이 쓰러져 있었다. 단순한 부패의 부산물뿐 아니라 형상을 가늠할 수 없는 이형들까지도 둘 앞에서는 무기력했다.


그 장면은 단순한 전투가 아니었다. 압도라는 말조차 부족했다.


라그나르의 감각을 타고 흐르던 전율은 아로스에게도 그대로 전해졌다. 시스테나 전선에서 마주했던 거인 아마룬 역시 전장을 뒤흔드는 힘을 지니고 있었지만 이 순간 만큼은 그조차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카야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전장을 움직이고 있었다. 적들을 일도양단하며 전선을 뒤흔드는 그 움직임은 단순한 힘을 넘어 전장이라는 개념 자체를 새기는 것이었다. 그녀가 왜 '전쟁의 신'으로 불리는지 납득이 되는 무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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